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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표현 Sep 06. 2021

고민하지 않은 자, 그 값을 치뤄라

조성기 <우리 시대의 소설가> 이상문학상 작품집

- 3500원 책 값의 ‘환불’ 의미

 <염소의 노래> 독자인 민준규는 소설가 강만우에게 3500원을 요구한다. 이 3500원은 민준규가 강만우의 책을 보기 위해 지불한 대가, 책값이다. 이런 단편적인 요소만 본다면 민준규가 단지 소비자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나는 민준규가 ‘고민하지 않고 글을 판매한 소설가에게 책임을 물으며, 문학에 대한 당신의 진짜 마음을 밝혀라’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민준규는 강만우의 소설 <염소의 노래>을 ‘말을 돌리는 소설’, ‘내용에 부합하지 않는 제목’, ‘소신껏 밀고 나가지 않고 온갖 계층의 독자들 눈치를 보는 느낌’, ‘물에 젖은 신문처럼 흐늘흐늘해져 건져낼 건더기가 하나도 없다’라고 평가한다. 상업성과 문학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그저 손이 가는 데로 글을 쓴 강만우에게 민준규는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강만우는 돈, 즉 상업성을 바라지 않고 예술을 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할 뿐, 강만우는 돈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염소의 노래>에 대한 환불을 요구하는 민준규의 전화를 받고 나서도 자신의 소설을 의심하기 보다는 민준규가 정말 ‘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소설을 읽은 것이 맞는지 의심할 뿐이다. 또한, 문화부장이 <염소의 노래>와 같은 글을 써달라 요구하자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한다. ‘환불을 해주면 소설가로서의 자존심은 진구렁에 던져버리고 마는 셈’이라고 말한 강만우지만, ‘권위’있는 누군가의 말에는 그가 쓴 단어만 곱씹을 뿐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이런 비굴한 모습을 민준규는 강만우의 글을 읽고 느꼈고, 이를 비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손’과 ‘청동의 문체’의 의미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

 손은 강만우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던 작품의 제목으로 그는 한 여학생의 손을 보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썼다. 그 여학생의 손을 보고 강만우는 어떠한 절 부처의 손을 떠올렸다. 소설의 내용은 ‘손에 손 잡고’라는 것이었지만, 강만우는 그 절을 떠올리며 부처들의 ‘자세’에 대해 회상한다. 그는 부처는 다양한 자세로 생로병사의 원리를 그 몸의 ‘자세’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부처의 ‘자세’에 대해 회상한 후 전시회에 가서 로댕의 작품을 본다. 그는 <팔 없는 사람의 명상>을 보는데, 그 작품은 손이 없어 <생각하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자세조차 할 수 없다. <팔 없는 사람의 명상>은 명상과 행동 사이의 모순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을 하는데, 왜인지 이는 소설을 쓰는 강만우와 닮아있다.

 강만우가 글, 소설, 문학을 대하는 ‘자세’는 어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만우는 소설가의 자존심은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소설가가 쓰는 ‘소설’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이는 <팔 없는 사람의 명상>처럼 강만우의 명상과 행동 사이의 모순을 보여준다. 과거 <팔 없는 사람의 명상>과 강만우는 생각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는 ‘손’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손’이 없어 자세를 취할 수 없는 강만우는 ‘청동의 문체’에 집착한다.

 강민우는 ‘내면과 현실을 청동의 문체로 표현해낼 때, 얼마나 강인하고 장중한 세계가 펼쳐질 것인가. 민우 씨는 지금껏 자신의 문체가 물렁한 목질의 문체이거나 방정맞은 양철의 문체였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라고 말하며 자신도 청동의 문체를 가지길 원한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대가들 또한 얻지 못한 것이다. 열하일기가 청동의 문체에 가깝지만, 그것 또한 한문이기 때문에 청동의 문체가 아니라 말하며 환불을 요구하는 독자 하나쯤 한방에 때려눕히는 ‘청동의 팔’을 지녀야 한다고 다짐한다.

 이 청동은 ‘조각상의 재료’이며 어떻게 재련하냐에 따라 손이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도, <팔 없는 사람의 명상>이 될 수도 있다. ‘청동’으로 어떤 ‘자세’를 만들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강민우는 그저 청동처럼 단단한 문체만 있다면 청동의 팔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잘 모르는, 대가들도 끝내 얻지 못했던 ‘청동의 문체’만 있다면 글을 읽는 누구든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의 집착하는, 그 껍데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갈망하는, 손을 잃어 자세조차 취할 수 없게 된 소설가의 모습은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강만우가 원하는 ‘청동의 문체’가 열하일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면 ‘절개’ 혹은 ‘굳건함’과 비슷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쓰고 있는 원고의 제목 <말의 섶> 속 세르베투스처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 그것이 ‘청동의 문체’가 아닐까. 

 그의 글이 ‘청동의 문체’처럼 강한 느낌이 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쓰고자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상업성을 띄는, 독자가 읽었을 때 재미있는, 잘 팔리는 소설을 쓸 것인지 문학성이 짙은 이야기를 집필할 것인지를 말이다. 어쩌면 껍데기의 불과할 수 있는 형용사의 위치 따위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알맹이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줏대 없는 신념은 섶의 세 번째 뜻인 굳건한 나무가 아니라 섶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가냘픈 줄기 식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세

 앞서 설명했든 강만우는 입장조차 존재하지 않은 사람 같다. 후반부에 광고가 찍혀있는 신문을 보관하는 모습, 돈이 많은 상류층 여성과 관계를 맺는 모습은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자신의 신념 따위 보다는 자본에 굴복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자본을 쫓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돈이 없다면 세상은 돌아가지 않으니까. 민준규도 그렇다고 생각할 것 같다. 민준규가 화가 난 이유는 자본에 굴복해 돈이 되는 소설을 쓰면서 고상한 척하고 싶어하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른 작품으로 보답하라라고 하는 것이 아닌 ‘돈’으로 보답하라 요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리 시대 소설가들이 확실한 스탠스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팔리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타임킬링용’ 과 같은 말이 어울리는 소설들을 쓸지, ‘문학성이 짙은’, ‘생각할게 많은’, ‘명작인’ 과 같은 평가가 어울리는 소설들을 쓸지를 고민해 이에 맞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독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동을 재련해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어떤 이야기를 쓰던 굳건한 나무가 될 수 있도록 하다보면 강만우가 그토록 바라던 ‘청동의 문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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