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단상

사랑과 사유

by 이수염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사랑이라는 단어에 매우 익숙하다. 사랑은 보살핌이었고, 설렘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뻗어 나간다. 나에게 사랑은 어떤 것일까?

인간에게 있는 가장 분류하기 어려운 감정이 사랑 아닐까? 사랑은 환희였다가, 분노이기도 하고, 슬픔이다가 증오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책임감 또는 회피이기도 하다. 사랑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다면, 쫓아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사랑은 복합적이다.

사랑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형태 또한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우정의 형태일 수도, 또 어떤 이는 설렘의 형태, 또 다른 이는 책임감이나 유대의 형태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랑의 형태 역시 저러한 모습으로 모양새를 갖추고 있을 뿐이지, 복합적인 본질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많이 해보았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을 적게 해 보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랑을 하다 보면, 결국 중요한 건 깊이감이다.

사랑을 하는 것은 자서전을 쓰는 것과 같다.

한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삶을 살아갈수록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인간의 자아성찰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겪은 인간관계나, 사회적 경험들을 토대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나 사유들로 일어난다. 즉 사랑을 하면 할수록 당신의 우주와 타인의 우주를 통해 더 깊이 성찰하고 내면을 직면하게 된다. 때문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상대의 우주를 깊이 있게 공유하는 행위이므로 대단히 어렵고도 숭고한 행위인 것이다.


니체는 사랑이라는 것이 우정의 고차원적 형태라고도 말했다. 몹시 동의한다. 앞서 말했든 타인과의 사랑은 복합적 형태로써 누군가와의 유대라는 감정을 토대로 이루어지기에 일반적으로 부르는 우정이라는 감정의 심화 형태인 셈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정도가 적든 많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사유를 하는 사람의 습성이다. 어느 생물도 퇴화하고 싶은 생물은 없기에, 설령 그게 퇴화라고 명명된다 하여도, 그 퇴화 역시 적을 위한 퇴화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진화, 즉 나아가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나 역시 생물에 포함되는 한 개체로서, 끊임없이 더 나은 개체가 되려고 나름대로 진화하며 살아왔다.

끊임없이 사유를 하고, 사랑을 하며, 성찰을 해왔다.

그동안의 이러한 행위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현재까지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항상 더 큰 우주가 있고, 더 깊은 바다가 있으며, 내가 모르는 자신이 있다.

사회적으로 부단히 노력하고, 성취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성공을 하는 것은 우리가 지상으로의 탑을 쌓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인간은 입체적이고 양면적이기 때문에, 아래로도 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영혼의 단단함, 깊이감 등이다. 그것들을 우리는 사랑을 하고 사유를 하고 성찰을 하며 얻을 수 있다. 이성적인 자아와 사회적인 나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우리가 살아오며 볼 수 있는 빙산의 일각인 셈이다.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어쩌면 일평생 나만이 볼 수 있는 거대한 빙하를 잘 만들어 내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갖는 일이고,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소명일지도 모른다.


올해의 나는 빙산의 일각이 도드라져 보이는 사람보다는 수면아래 잠겨있는 빙하에 내면의 사유와 성찰,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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