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의 이별
어느 겨울밤, OTT 플랫폼을 둘러보던 내게 <캐롤> 썸네일이 유난히 커보였다. 자석처럼 손가락이 옮겨갔고 내 두 시간이 사라졌다. 케이트 블란쳇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세련된 장갑과 모자, 폭신하고 부드러운 코트, 각진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가 꿈에 나왔다. '캐롤'이라는 배역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다른 배우의 캐롤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캐롤을 바라보는 테레즈의 눈빛까지. 아, 테레즈는 캐롤에게 첫눈에 반했구나, 라는 걸 각인시키는 그 눈빛.
첫눈에 반한다는 말. 믿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는 데에 어떠한 서사 없이 곧장 이끌린다는 게 정말 가능한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하지만 정말, 정말 첫눈에 반한다는 게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내 인생에도 한번쯤 캐롤이 다가올까.
하지만 그 뒤로 연애선과 완전히 끊긴 건지, 간질한 상황 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열심히 일을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내게도 운명처럼 캐롤이 다가왔다.
첫눈에 반한 사람이 생겼다는 말이다. 이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사랑에 대한 비관적 생각을 모두 엎어버리는,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얼굴과 목소리, 친절한 매너까지 고루 갖춘 사람이었다. 이제 그를 캐롤이라고 부르겠다.
캐롤은 아주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졌다. 그래서 사실 만나기 전, 전화할 때부터 이미 반쯤은 그에게 홀렸다. 새벽까지 그와 통화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하는 게 참 좋았다. 서로 호감을 확인한 상태에서 첫 만남을 가졌고, 우리는 그날부터 서로의 연인이 되기로 했다.
4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그와 행복하게 만났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서로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행운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내 첫사랑이었다. 내가 마음에 온전히 담았던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와 헤어졌다.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이제 나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사랑이 식었다는 말인지 재차 물었지만 그냥 지쳤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긍정의 말이었을 테지.
꽤 오래 전부터 쓰고 있던 연애 에세이가 있었다. 제목은 <캐롤 찾기>. 다사다난했던 내 연애사를 가볍게 풀어낸 에세이다. 본래 <캐롤찾기>의 종착지는 그가 될 터였다. 그와 행복하게 만나고 있고, 나의 캐롤을 찾아 행복하다는 말로 끝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헤어져버렸다. 뭐, 이렇게 끝나도 결국 그가 종착지인 건 매한가지인가. 생각해보면 영화에서도 캐롤과 테레즈는 이어지지 않았지.
마지막 데이트로부터 이틀만에 우리는 관계를 정리했다. 4년이라는 기간이 무색하게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은 몇마디가 이별의 전부다. 구질구질하게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단어와 문장에서 애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시들해졌다는 걸 얼마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구태여 모른척 했다. 내가 모른척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싶어서.
5월 1일. 근로자의 날에 쉰다며 늦게까지 데이트를 하자던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일찍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냥 푹 쉬고 싶다고, 물어보지 않은 이유를 덧붙였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정말 푹 쉬길 바랐기 때문이다. 푹 쉬면서 몸의 피곤이 나아지면 나에 대한 피로도도 나아질까 싶었다.
하지만 일찍 헤어지고 하루가 지날 때까지 그에게는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나는 카톡으로 그에게 다음 주말에 무엇을 할지 보냈다. 연극을 보자고 했다가, 맛집을 가자고 했다가. 빨리 장소를 정해야 다음주에도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번 긍정의 대답이 왔지만 소용 없었다. 다음날 곧바로 권태기가 왔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대체 하룻밤 사이 그는 어떤 생각 정리를 끝낸 걸까. 그전부터 조금씩 준비해왔던 이별을 이제야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생긴 걸까. 그래도 그가 곧장 이별을 전한 게 아니라 '권태기'를 언급한 건, 조금은 희망이 있다는 걸까.
그런 건 없었다. 나는 희망을 담아 '내 노력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는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바로 끝내길 원하냐'는 말에는 '그래도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고 답했다.
그래도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라는 단어를 본 순간 이미 그는 모든 정리를 끝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은 내게 정리할 시간을 준다는 말이었다. 그럼 권태기라는 말로 내게 희망을 주지 말았어야지. 희망 뒤에 오는 절망이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이.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고작 6시간 만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돌아서지 않을 걸 아는데, 일주일을 기다리든 한달을 기다리든 무슨 의미가 있나. 나만 밤새 복잡한 머리로 악몽을 꾸는 거지. 악몽을 꿀 정도로 잠에 오래 들지도 못했지만.
뜬눈으로 그의 출근시간만을 기다리다가 먼저 연락했다. 내가 못해준 부분이 있다면 미안하다고 찌질하게 매달렸다. 나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매달리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더 잘하겠다는 나의 말에 그는 아니라고 답했다. 4년동안 서로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 그를 움직이게 할 원동력이 없다고 했다. 사랑이 떨어졌다는 말이겠지. 나를 위해 노력할 원동력, 사랑.
얼굴을 보면 더 힘들 거라며, 이렇게 끝내자는 그에게 나는 비참하지만 동조했다. 사귈때야 무슨 말을 못하겠냐마는, 그가 나에게 4년동안 꾸준하게 했던 말 중 하나는 '네가 차지 않는 이상 난 너에게 헤어지자고 하지 않아.' 였다. 거짓말쟁이.
끝없이 미안하다는 그에게 나는 항복했다. 그래. 여기가 우리의 끝인가 보다.
- 그래도 긴 시간동안 재밌고 즐거운 추억 많이 만들어줘서 고마워. 오빠는 정말 내 첫사랑이었어.
- 나도 너 만나면서 정말 행복했어.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 정말 아니야. 너무 힘들고 눈물나는데 이제 더 노력한다 해서 달라질 게 없어.
나의 잘못도, 너의 잘못도 아니라며 여기까지만 하자는 말이 이렇게 슬픈데 신기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정작 이별을 고한 사람은 눈물이 난다는데, 이게 맞는 건가. 초연하게 카페에서 표정없는 얼굴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나도 참 이상한 사람이다.
눈물이 없는 것치고 마음은 평온하지가 못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에 잠기고 있는 것 같다. 1분이 지날 때마다 기분이 새롭다. 이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의 마음이구나. 이렇게 불편하고 답답하구나.
그렇다고 그가 밉지는 않다. 이제 미워한다고 한들 전해줄 방법도 없지만 정말 괜찮다. 마음이 식는 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생각하려 한다. 계속 감정이 변하는 만큼 내일의 나는 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술 생각이 나는데 먹지는 않을 예정이다. 술을 먹는다고 슬픔이 가시는 건 아니니까. 혹시라도 그에게 실수할지 걱정이 되는 것도 있다. 아직 이렇게나 미련이 남는데, 취하면 어떻게든 연락하려고 할 게 뻔하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럴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내 첫사랑이 끝났다. 헤어져도 밥만 잘 먹더라는 노래와는 다르게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입 근처까지 음식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커피만 세잔째. 속이 쓰리다.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그의 답장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완전히 끝났다. 공유하던 어플도, 게시물도 지웠다. 빠르게 정리하려고 사진첩도 한 번에 지우고, 휴지통까지 비웠다. 다시는 복원할 수 없게.
매일 일기를 쓰는 습관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4년간 써온 일기장은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 중이다. 모든 페이지가 그의 이야기 뿐이라 들여다 볼 수가 없다. 버려야 할까.
혹시나 이번 이별 뒤에 내가 모르는 사건이 있더라도 괜찮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이니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날 거다. 앞으로 그가 내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소망이다. 오늘 집에 가서, 일기장을 정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