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만 나와주세요

by 이계절

자꾸 그가 꿈에 나온다.


헤어지던 날, 그에게 청혼받는 꿈을 꾸었다. 주위에는 나무만 가득한 둘만의 공간에서 반지를 내밀며 내게 결혼을 묻는 그에게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이별.


헤어진 다음 둘째, 셋째 날에는 그와 갔던 음식점이나 카페들이 줄지어 꿈에 나왔다. 나 혹은 그의 집 근처 풍경이 그대로 보이는 식당에서 마주 앉아 싱그럽게 웃는 둘. 분명 4년 중 어느 날이었을 텐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원래 꿈이란 게 이것저것 섞인 모습이니까.


일주일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내 꿈에 매일 출석한다. 더 이상 웃고 떠드는 우리가 아니라는 게 다를 뿐이다. 꿈에서 나는, 그 앞에서 엉엉 울며 제발 돌아와 달라고 빌고 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난 계속 붙잡고 그는 계속 외면하고. 한참을 반복하다가 눈을 뜨면 해가 중천이다. 하루를 또 망치는 거다.


스스로 무던한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2주가 되도록 이런 꿈을 꾸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처음에 했던 다짐은 잘 지키고 있다. 괜찮아질 때까지 술 먹지 않기, 그에게 절대 연락하지 않기, 울지 않기. 그런데 무의식이 지배하는 꿈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건가.


그럼 내 무의식에는 아직도 그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비워내려고 애도 써봤고 다른 일에 몰두하며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그럼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힌다는 말. 당연하다. 깊은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다. 아무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뿐이지. 그 고통스러운 과정은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임시방편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잠자리가 워낙 예민한 탓에 그와 함께 잠들 때면 뜬눈으로 밤을 새곤 했다. 밤새 뒤척이는 내 옆에는 코를 고는 그가 있었다. 잠귀도 어둡고 어디서든 숙면을 취하는 그는 누가 업어가는 줄도 모르고 코를 골아댔다.

그럴 때마다 잠을 못 자니 그에게 화를 냈다. 조용히 좀 잘 수 없겠느냐고. 새벽 내내 한숨도 못 자고 아침에 운전해야 하는 내 생각은 안 하느냐고.


생각해보니 억지다. 코를 골고 싶어서 고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는 연인을 잠 못 들게 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거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그에게 화풀이를 한 셈이다. 이렇게 얼굴도 못 보고 헤어질 줄 알았으면 화낼 시간에 얼굴이나 한 번 더 눈에 담아둘걸.


그와 나는 4살 차이였고, 4년을 만났다. 지금 내 나이가, 그의 4년 전 나이라는 말이다. 그가 나와 처음 만났던 나이가 되고 나니 나를 얼마나 어리게 봤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 많이 맞춰줬을 거고 져 줬을 텐데. 항상 고마운 건 다 지나고 나서야 보인다.


그는 내게 좋은 남자친구였다. 그래서 앞으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만 같다. 언젠가 다른 사람을 만나 지금을 떠올리면 이렇게 힘들어했던 게 우스울 수 있지만 당장은 그렇다. 그러니까 계속 꿈에 나오나 보다. 이 망할 미련 때문에.


나는 그에게 좋은 여자친구였을까. 항상 내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주었던 그였지만 결국은 사랑이 바닥난 걸 보면 그리 좋은 여자친구가 아니었던 걸까. 미련은 남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어느 상황이나 아쉬움은 남을 수밖에 없다. 그와 내가 가진 사랑의 기준이 달랐고, 온도가 달랐고 방식이 달랐다는 걸 이해한다. 그의 사랑은 식어버렸지만 내 사랑은 아직 그를 향하는 이유다. 이해 끝에 아쉬움이 남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오늘도 나는 이 아쉬움 속에서 최선을 다해 그를 잊어보려 애쓰다 잠들 거다. 그는 또 꿈에 나오겠지. 잘 가, 하는 인사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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