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나이 마흔'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다 쉬다를 오가는 사이 나는 마흔넷이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만 나이로 통일한다니 그럼 마흔 둘로 회춘(?)을 하겠지만 이 글을 시작한 이후로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 문득 여유가 생겨서 최근 몇 년 간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 인간은 진화한다. 나 역시 이전에 비해 발전한 부분이 있다. 특히 마흔이 넘어가니 이전에는 에너지와 의욕이 넘쳐 생각 이전에 언행이 튀어나가 엇박자를 이뤘던 것들을 찬찬히 마음 스캔을 하면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잠시 멈추고 이걸 내가 하는 게 맞는지, 하지 않는 게 맞는지, 지금 멈추는 것이 맞는지, 나아가는 것이 맞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제야 박자가 좀 맞는 몸과 마음이 합치된 답을 준다.
- 서두르지 않아도 될 일은 되고, 아무리 노력을 쏟아부어도 안 될 일은 안 된다는 깨달음도 있다. 물론 안 될 일이니 처음부터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때로 되지 않아서 오히려 잘 된 일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치와 순리를 배워간달까? 흘러가는 것이 있고, 나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들이 있고 안 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 이젠 진심이 일지 않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이건 노화로 인한 신체적 에너지의 감소와 집중력 저하로 인한 안타까운(?) 결과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내 에너지와 시간이 귀해지니 나의 이 귀한 자원들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더욱 고민하게 되고 그 결과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삶은 여러 미션을 준다. 내가 원했던 아니던 할 수밖에 없는 책임이라는 이름의 인생 미션이란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내가 가진 재능과 에너지로 이루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진심을 빼놓지 않고는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 나는 내게만 특별한 의지와 에너지가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상황이 어렵더라도 내가 노력을 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근거 없는 특별 자신감으로 살아왔다. 어리석었다. 그러고 나서 불안은 한데 하고 싶은 것들은 많으니 늘 비현실적인 이상을 꿈꾸며 그 명목에 그게 가능할 거라며 무리한 플랜을 세웠다. 아닌 것은 아닌데 나만이 노력, 시간, 돈을 들이부었다. 안 되는 것은 초반에 딱 끊었어야 했는데 문어다리처럼 관심과 희망을 여러 갈래로 걸쳐놓은 채로 질질 끌다 결국 힘은 힘대로 다 빼고, 보람은 당연히 없거니와 결국은 욕까지 먹고 그 책임까지 고스란히 맞는 최악의 결말을 많이 만났다.
- 함께 있을 때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고, 충분히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부족한 부분에서는 순수한 의지로 내가 더욱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의지를 갖게 하는 사람을 만나야 했었다. 관계라는 것도 여러 면에서 주고받아야 하기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빚쟁이처럼 되는 감정, 노력, 시간, 물질적 채무관계가 되면 곤란하다. 대부분 이런 경우 받은 쪽이 고마워하기보다 준 사람에게 왜 더 주지 않냐고 몰아세우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이런 관계는 건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Positivity를 갉아먹는 것은 관계가 될 수 없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것이 관계의 기본 바탕이다.
- 청소와 정리를 조금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빨래를 개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적어야 하는 사람이고 적다 보면 영감이 떠오를 때 해야 하기 때문에 이내 빨래는 바닥에 뒹굴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습관 (정리 잘 못 하는 습관)에 혼이 많이 났고, 나 역시 이에 대한 열등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크다 보니 나는 정리를 잘 못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호기심이라는 에너지가 평균 이상이고 집보다는 집을 뛰쳐나가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은 다른 영역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이 조직적으로 살고 집단생활을 원만히 하기 위해 정리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정리를 잘하는 것이 디폴트, 그렇지 못하는 것이 하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정리를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리 컨설팅을 받고 (물론 그대로 유지하는 건 애초부터 목표가 아니었다.) 나 나름대로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속옷은 개켜서 옷장에 가지런히 넣는 대신 (내 안에 그런 DNA는 없다. 빨래는 어차피 다시 펴서 입어야 하는데 왜 그 작은 걸 접어서 넣어야 하는가?? 이게 내 생각이다) 작은 바구니 여러 개를 사서 종류별로 접지 않은 채로 넣어두는 방식으로 내 정리 생활을 정의했다. 혼삶을 살다 보니 어지르는 것도 치우는 것도 오로지 나의 탓, 나의 몫. 이전에는 마지못해 누군가를 위해 귀찮아하며 했었다면 이젠 미리 한다. 그것도 내 방식으로
- 앞으로 내 인생은 많은 시간이 혼자이고 나는 혼술을 주로 하며 많은 시간 고독을 느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혼자가 아닌 시간에는 그럼 늘 행복했었던가? 이젠 외로움을 잊으려 뭔가를 하기보다 인간에게 고독이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외로움을 잊기 위한 액티비티를 만드는 것은 안 하는 것이 좋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장점은 아무리 어지러운 상황, 시작과 달리 케이오스에 빠져 끝나버린 관계에서도 나를 돌아보는 습관. 모든 일은 그리고 관계는 상호작용이기에 아무리 미친놈/미친년을 만났더라도 나 역시 저쪽의 입장에서는 미친년/미친놈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 이 미친놈/미친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남 핑계대기보다는 endless 무모한 말싸움과 트집을 이어가기보다 나를 돌아보며 '침묵'을 지키는 일이 낫겠다. 사실 욕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무언' '무응답'이다. 무언은 적어도 뒤탈을 만들지 않는다. 내 분에 못 이겨 온갖 감정을 실어 그것을 뱉고 난 직후는 시원할지 모르지만 상대의 긴 무언 앞에서 이는 스스로에게 곧 자괴감으로 돌아올 뿐이다. 나를 돌아보면 되었다. 상대가 어쨌든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상대가 이상하든 말든 (나도 그쪽 입장에서는 얼마든 이상할 수 있다.) 가장 큰 무게의 말은 '침묵'이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까, 어떠한 삶을 살게 될까?? 내 나이 어느덧 마흔 중반을 달려가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는 어느 대학을 갈까, 어떤 삶이 내 앞에 펼쳐질까 막연히 생각하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냥 늘 이렇게 궁금해하며 살아갈 것 같다. 너무 긴 미래를 생각하고 궁금해할 것도 없겠다. 그저 오늘 하루를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