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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스이즈아프리카 Aug 18. 2023

계약, 해지하시죠

'건축사'보다는 '건축가'였다

 사람이 하는 일.

 나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을 하고 있어, 일에 감정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력이 투입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아웃풋의 퀄리티가 항상 같을 수 없고, 사람이니까 지치고 뿌듯하고, 일 뿐만아니라 생활이나 날씨등 수많은 요소들로부터 방해를 받고 이겨내고를 반복하는 것. 어느 순간에는 번쩍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암담하기도 한. 창의성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일도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최근 AI인 Chat GPT와 Midjourney의 유료버전을 쓰면서도 느낀다. 같은 목표에 대한 반복된 작업물에서는 오류가 난다. 수정 명령어를 아무리 교묘하게 넣어도 퀄리티가 썩 좋아지지 않는다.


이 철딱서니 없는 눈 같으니 !

  계약 후 약 2개월의 시간이 걸려 1차 설계가 나왔고, 이런 저런 조율을 하며 시간이 흘렀다. 견적을 받는데에 시간이 걸렸고, 높은 견적으로 인해 고민하면서 시간이 또 흘렀다. 건축사무소 측에선 1차 설계를 엎고 건축 비용을 아낄 수 있는 방향으로 다시 설계를 해 주시겠다고 했다. 시간이 흘렀고 거의 모든 것이 뒤바뀐 새로운 설계 안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진행을 맡았던 팀장님이 지쳐가는 것이 보여 마음이 많이 쓰였다.

 집의 설계를 맡긴다는 것은 참 독특한 마음이었다. 내가 살 집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그 사람이 나를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도 끝없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머리와 마음과 손에서 비롯되는 일이라 더욱 그런 듯 했다. 두 번째 설계를 시작해야할 때 이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맥이 빠졌을 것이다. 지쳤을 것이다. 내가 1차 설계를 그냥 보내기 아까운 그 마음의 몇 배, 아니 몇 십배는 속상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보이기엔 그랬다. 음. 흔쾌하다기보다는 쿨하게?) 다시 설계를 해주신다는 그 말이 참 고마웠다.

 2차설계 안이 나왔다는 말에 긴장을 안고 건축사무소를 방문했다. 뭔가 어느순간부터 어렵게 가고 있는 것 같아, 쉽게 처리하고 싶었다.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냥 진행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고 방문을 했다. 그러나, 2차 설계 안을 보니 1차 설계에 내 눈이 너무 높아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게 문제다. 그리고 나는 세계 곳곳의 하이엔드 숙소나 좋다는 걸 너무 많이 보고 다녔다. 세상 부유한 느낌만 잔뜩 모아놓은 핀터레스트도 한몫을 했다. 내 주머니와 내 눈이 타협을 못하고 등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망할 눈! 내 주머니 사정도 모르고 이 철딱서니 없는 눈!


그냥 쉽게 가면 안돼요?

 도저히 2차 설계와 타협할 수 없었다. 여전히 멋진 건축물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집'은 아니었다.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죄송해서 눈도 못 마주칠 상황이었다. 회피형 인간인 나는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뭐 돼? 저들보다 건축에 대해 뭘 알아? 전문가들 제안을 내가 뭔데 또 싫다고 해? 돈 많냐? 스스로를 할퀴는 생각들이 많아졌다.

 다시 설계를 해달라고 할 자신이 없다. 그런 말을 꺼내고 있을 염치없는 스스로가 용납이 안되었다. 건축사무소 입장에선 우리와의 계약이 "  X 밟은 셈" 일테다.

 그래서 기껏 생각해낸 게, 그냥 인스타그램 같은데에 많이 보이는 소위 '인스타그래머블'한 건축물을 지어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건물에는 힘을 다 빼고, 문짝이나 창문 같은데에 포인트를 줘서 한 단면 또는 한 장면에만 눈이 가도록. 건축사와 건축주 모두 서로 그냥 쉽게 쉽게 갈 수 있지 않을까..?

 한 참을 듣던 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고민이나 철학없이 유행을 따른 건축물을 지을 생각이 없고, 우리의 요청을 들었을 때 회의감도 들었다고. 우리가 원한다면 계약을 해지해도 좋다고.

 무리하게 진행을 하다가, 우리와의 관계도 결국 나빠질 게 우려된다고.

깊은 고민과 한숨이 느껴지는 대답이어서 마음이 철렁했다. 건축주가 취할 수 있는 옵션 중 가장 나쁜 옵션을 들이민 것 같았다. 건축을 완수해낼 능력도 없으면서, 건축가의 명예와 정신까지 훼손시키는 최악의 건축주!

 내가 소장님이었다면, 어떤 대답을 했을까? 지금까지 고민하고 공들인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어허둥개 달래어 대충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을 것 같았다. 혹은 얼마전 건물을 지은 내 친구가 설계를 맡겼던 건축사처럼, 건축주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원설계만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올리고 연락을 끊어버리는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

 맞아. 투입대비 효용을 따진다면, 우리같은 건축주를 버리는게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이와이아키텍츠는 그런 건축사무소가 아니었다.

 소장님은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시고, 다시. 다시 뭘 원하는지 물으셨다.

으악.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존경이 밀려왔다. 우리가 프로젝트를 맡긴 곳이 건축사무소의 소장님이 아니라 '건축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단지 아름답고 독특한 건물을 디자인하고 뼈대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공간 안에서 숨쉬고 살아갈 사람에 집중하고 배려하는 진짜 건축가. 건축의 본질을 소장님을 통해 마주하는 듯 했다.

  건축이 진행되는 지금까지도, 돌이켜보면 단 한번도 건축사무소를 의심하거나 뭐 잘못되어가는 거 아닌가? 라고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즈음에 쌓였던 무한한 신뢰와 감사함은 우리가 계속 부딪혀 갈 수 많은 일들에서 '당연한 안심'이 되어오고 있다.


 아무튼, 제이와이아키텍츠 최고.


제이와이아키텍츠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제이와이아키텍츠 사무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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