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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킴 Jun 23. 2021

여름의 냄새

 지난주 내 흐리더니 며칠 동안 맑은 날의 연속이다. 진짜 여름 날씨를 맞아 오랜만에 원피스를 꺼내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집에서 돈가스를 튀기다가 생긴 기름이 2도의 작은 화상을 만들었고 경과를 보러 가는 길이다. 버스 장류장에 서서 원피스 밑으로 나온 다리를 보니 순간 창피했다. 창피한 기분을 들게 만든 건 나의 너무나 하얀 다리 때문이었다. 하-얀 다리는 까만 발등과 비교가 되어서인지 더 하얘 보였다. 본래 하얀 피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하얘 보였던 건 그날의 날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청량하고 맑고 뜨거웠던 그 날씨에 이 피부 색깔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얀 다리가 창피했기 때문에.

 그래 나는 여름에 하얬던 적이 없는 사람이지. 결혼식장에도 까만 팔을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었지, 그랬지.

 다음 날 정안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내고 집안 정리를 끝내고 큰 가방에 책 한 권과 비치 타월 한 장을 넣고 집을 나섰다. 작년에 입고 넣어 뒀던 끈이 얇은 나시 원피스를 꺼내 입고 그 위에 반팔을 걸쳐 입고 버스를 타러 갔다. 어른들만 사는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은 원피스라 바로 입고 나설 용기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함덕 해수욕장 근처 정류장에 내려 올리브영으로 들어갔다. 태닝오일을 정말 오랜만에 샀다. 예전에 사용하던 브랜드는 이제 더 이상 수입이 되지 않는 걸까 처음 보는 브랜드를 사서 가방에 넣고 바로 옆 스타벅스로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놓고, 2층에 올라가 화장실에 가서 위에 입고 나온 반팔을 벗어 가방에 구겨 넣었다. 준비된 커피를 가지고 해변으로 향했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평상시보다) 조금 적었다. 다행히 나 말고도 햇빛을 쬐며 책을 읽는 외국인들이 몇 보였다. 비키니를 입기엔 준비되지 않은 몸이라 원피스를 입고 그대로 태닝 오일을 발랐다. 종아리, 허벅지 밑 부분, 팔, 어깨 보이는 부분만 내가 팔이 닿는 부분에만 열심히 바르고 에어팟을 끼니 세상이 조용해졌다. 뜨거운 햇살과 바다, 모래만 느껴졌다. 내가 사랑했던 그 여름이다. 기름이 튀어 피부병처럼 띄엄띄엄 생긴 흉터는 자외선을 보면 안 된다고 해서 덕지덕지 반창고를 붙이고 나왔다. 그때 내가 알던 여름의 냄새가 느껴졌다. 달콤한 태닝 오일 냄새. 요즘 태닝 오일은 번들번들 거리고 손에 묻는 게 아니라 바르고 나면 금방 뽀송뽀송해지고 손에 남는 잔여감도 없었다. 모래가 덕지덕지 묻지도 않고 깔끔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가방에 가지고 온 물티슈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나의 오래된 기억까지 민망해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그 달콤한 향기. 꽃내음도 아닌 것이, 달큼한 이 냄새는 익숙했다. 그래, 이게 내가 알던 여름의 냄새지. 오랜만의 여유에 기분이 좋아졌다.


 


 노래도 듣고 싶지 않았고, 책을 읽고 싶지도 않았다. 커피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햇살이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뜨거운 햇살에 커피 속 얼음은 금방 녹아버렸고, 책은 절반도 읽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뚱뚱한 내 몸이 부끄럽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시선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내일도 날씨가 맑으면 또다시 나오리라 했지만 제주의 날씨는 그렇게 일정하지 못하다. 오늘 뚜렷한 밤하늘의 달을 보았다 하더라도 다음날엔 흐린 게 제주도다. 오늘은 비록 흐린 하늘을 핑계로 해변가에 누워있지 못했지만 다행히 여름은 이제 시작이다. 넓은 함덕 바다에 누워 여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아직 많이 남았다. 비키니를 입고 마스크를 쓴 채 사진을 찍는 젊은 아가씨들이 안쓰러웠다. 나의 바다엔 마스크가 없었는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마스크를 낀 채 태닝 하는 게 말이 되지 않지만 그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여름의 냄새는 그대로인데, 마스크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그 달콤함은 그대로인데, 꽤 많은 것이 바뀌었다. 또다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 여름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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