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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킴 Oct 06. 2021

제주의 가을

 습도 80%가 넘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범벅이 되어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켜고 자리에 앉았다. 지난여름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의 이야기다. 지금은 10월의 첫째 주다.


 제주의 사계절은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 나오는 설명과는 조금 다르다. 아니, 조금 느리다고 하는 게 맞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정안아, 봄에 꽃이 피는 거야.”라고 말은 했지만 제주의 여름은 온 천지에 다 꽃이다. 지나가는 길에 이름 모를 꽃들이 어찌나 많은지. 8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 담장을 따라 길게 늘어 뜨려 진 능소화를 보면 꽃이 봄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원에 심어진 이름 모를 분홍색 꽃나무도, 가로수 나무 아래 피어 있는 빨간색 꽃들도 모두 여름에 볼 수 있다. 이런 날씨에 시들지 않는 (녹아내리지 않는) 꽃의 생명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 분홍 꽃들이 9월이 되니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안아, 겨울엔 초록 풀들이 떨어지고 나뭇가지만 남아.”라고 말은 했지만 제주의 겨울엔 초록이 남아있다. 침엽수 울창한 숲길도, 겨울에 조금 시들기는 하지만 야자수에도 초록은 남아있다. 제주는 가을에도, 겨울에도 초록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을과 다른 9월의 어느 날.

 

 9월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다. 그러나 작년 9월은 여름의 연속이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열심히 걸어 다니던 기억이 난다. 9월 말까지 더워서 동쪽에 있는 해변 이곳저곳을 열심히 다녔더랬다. 여름이 길어서 마냥 행복했던 우리. 7,8월의 뜨거운 제주를 몰랐기에 많이 덥지 않은 긴 여름이 좋았다.

 올해 9월의 시작은 비였다. 일주일 넘게 매일 비가 내렸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흐린 날이 지속됐다. 비가 오는 탓일까 아침, 저녁으로 꽤나 쌀쌀해 정안이는 긴팔을 입고 등원했다. 옷차림에서부터 가을이 시작됨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흐린 하늘은 제주에 와서 익숙해졌다.

 나에게 가을은 항상 높고 푸른 하늘, 경주에 가기 좋은 날, 그 정도였다. 가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오는지 관심도 없었고, 여름과 겨울 사이의 짧은 다리,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금방 끝나버리는 다리였다.

 그러나 제주에 오고 가을을 기다렸다. 아이와 함께 어디든 갈 수 있는 가을을 기다렸다. 제주의 여름은 물론 아름답다. 에메랄드 빛 바다며, 위로 치솟은 야자수는 이국적이라서 여행 온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숨 막히는 습도와 햇살도 여름 안에서 용서가 된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 아이와 함께 야외 활동을 할 수는 없다. 며칠 놀러 온 관광객이라면 쏟아지는 햇살에 행복해했을 텐데 사는 사람은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땀이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이런 날씨에 마스크까지 하고 놀아야 한다면 아이도 엄마도 금방 지친다. 그늘 하나 없는 햇빛 아래 모래 놀이도 금방 지친다. 제주는 실내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쇼핑몰이나 백화점이 없고 야외 테마파크, 놀이공원, 해변 등이 많다 보니 더더욱 여름은 아이와 놀기 힘든 계절이다. 자연으로 나가 뛰어놀려고 해도 날씨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것도 유아와 함께라면. 그러다 보니 아이와 함께 나가 놀기엔 가을만 한 날씨가 없다. 여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장소에 따라 계절을 다르게 느끼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육지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여름과 가을이다. 겨울의 뉴욕이나 여름의 시드니 같은 동경과 기대와는 또 다르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 따라 달라지는 계절의 울림. 지금 내가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이것들은 달라진다.

 

보통의 10월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새 10월이 되었다. 비 내리던 9월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10월의 가을볕은 여름보다  따갑고, 아직 습기는 공기 중에 가득하다. 주말이면 가까운 해변에 가서 물놀이를 한다. 여름에는 사람이 많아서 하지 못했던 튜브 타기도  본다. 여름이 빨리 가고 가을이 오기를 그토록 기다렸건만 여기는 아직 여름이다.   감나무는 색이 변했고, 귤밭의 귤들도 점점 노란색을 뗘간다. 그래서 가을이구나, 하는 거지 사실 여름과 별반 다를  없는 기분이다. 습도는 9월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낮아진 기온 덕분에  막히는 더위는 아니지만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땀이 나고, 여전히 모기에게 공격을 받는다.

 여름인지 가을인지 헷갈리는 제주의 가을. 그래도 햇살 부서지는 가을볕 아래 모든 것이 아름다운 제주다. 훗날 제주가 아닌 다른 곳에 산다면 사계절 중 어느 계절에 제주에 오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가을의 제주, 10월의 제주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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