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잔인하다.
5월 1일이 되면 고민이 시작된다. 어린이 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쪼르륵 따라온다. 나 같은 경우엔 스승의 날 전날에 친언니의 생일도 들어가 있다. 5월이 되면서부터 고민은 시작되었지만 결국엔 5월 5일 아침까지 당장 어린이날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선물을 사야 하는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정안은 아직 어린이날이 뭔지도 잘 모르고, 이 날에 뭘 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요구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런 아이에게 선물을 사주고, 뭔가 특별한 것을 해야만 한다는 그런 압박이 세상의 모든 부모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한다.
어디든 가야 할 것 같고 뭐라도 사야 할 것 같은 기분. 이것저것 검색도 해보고, 머리도 굴려봤지만 결국 당일엔 매번 가는 칠성통에서 신발이랑 옷을 잔뜩 사고, 오후에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바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엔 정안이 좋아하는 생선 반찬을 먹었다. 아침에 "엄마! 저녁엔 생선 반찬 먹을래요."라고 말했기 때문에 무조건 생선을 먹어야 한다. 여느 주말과 다름없는 하루였지만 오늘 하루 아이가 행복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특별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나의 좁은 시야에서 나온 생각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진 속 정안은 오늘도 행복해 보였다. 그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나 어린이를 혐오하는 문화가 판치는 요즘. 어린이날에는, 아니 욕심을 조금 더 내서 5월에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아기와 어린이를 애정의 눈으로 봐주면 좋겠다. 세상 모든 어린이들은 사랑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한숨 돌리기도 전에 이제는 양가 부모님의 어버이날 선물이 걱정이다. 사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결혼 전이나 후에 시댁에 어버이날 용돈을 제대로 드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시어머님은 우리가 뭐라도 사면 큰일 나는 줄 아신다. 큰아들이 타지에서 고생하며 애하나 키우기도 힘들 텐데 이런 돈을 왜 주냐는 식이다. 돈은 안 받으실 게 뻔해서 늘 선물을 사곤 하는데 그것도 어머님 생신 때나 한 번 사드리지 그 외의 행사엔 일절 안 한다. 나는 우리 어머님께 세상 좋은 선물을 드리고 싶다. 이 마음을 제대로 전한 적이 없어서일까, 어버이날이 되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번 어버이날엔 제대로 된 선물을 좀 드리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역시나 그러지 못했다. 제대로 된 인사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정안과의 화상통화가 전부였다. 머리만 열심히 굴렸지 결과물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친정부모님께도 딱히 다를 것 없다. 설날이나 생일처럼 어버이날에도 인사말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조카 선물이나 용돈이나 주려 고치면 허튼데 돈 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자기 돈으로 조카에게 '이모가' 하면서 전해준다. 그래도 생일엔 좀 다르겠지. 돈으로 주면 안 받을 게 뻔하니 좋은 화장품 하나 보내야겠다. 직접 만나서 생일 축하를 안 한 지 셀 수가 없을 만큼 오래됐다. 각자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 함께 케이크에 초를 분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다른 자매들처럼 죽고 못 사는 베스트 프렌드 같은 자매는 아니지만 항상 내편에서 모든 것을 해주는 언니라 항상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나 사는 거 바빠 엄마 아빠한테 무심한 딸이지만 사실은 언니가 잘하는 걸 알아서 언니 믿고 안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바로 찾아오는 스승의 날. 아이에게 스승이라고 할만한 선생님은 아직 없지만 내일 케어해주시는 담임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 날이다. 사실 선물 받지 않겠다는 공문이 날아오길 내심 기다렸으나 그런 소식은 오지 않았다. 뭘 선물로 드려야 하나 고민이다. 기프트카드가 가장 실용적이긴 하나 정성이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어 늘 하면서도 찝찝한 선물이다. 새로운 어린이집에 다닌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한 달도 안 되어 기저귀를 떼고, 어린이집 가는 내내 싫다고 한 적 한 번 없이 잘 다녀주는 건 어쩌면 선생님의 덕분인 것만 같아 그냥 넘길 수도 없다.
나에게 5월은 그런 날이다. 해주지 못하는 미안한 달. 하려고 해도 거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되는 그런 달. 5월은 사실 잔인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민 저런 고민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5월이지만, 나처럼 연락이나 표현에 인색한 사람들이 한 번 정도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라고 멍석을 깔아 둔 이 달이 머리가 지끈 아플 정도로 잔인했던 건 늘 마음의 미안함이 커서 인 듯하다.
더 주고 싶은 마음, 지나 온 시간들에 차곡차곡 쌓여 온 고마운 마음들, 평상시에 잘하지 못함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 이런 마음들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하는 게 5월이라, 그래서 잔인하게 느껴졌나 보다. 5월이 지나고 나면 조금 마음이 놓일까. 몸이 떨어져 있으니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커진 것도 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이 여기에 더 겹쳐진 것이리라. 오늘 아이는 태어나 처음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갔고, 우리는 다시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더 자주 만나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것만이 5월의 잔인함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