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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지 Apr 22. 2021

엄마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식에게 책 읽는 습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먼저 보여줘야 한다.' 오래전 tv 속 교육 전문가가 한 말로 기억한다. 다른 묘책을 바랐던 부모들의 아연실색하는 표정을 떠올리며 나의 엄마를 생각해본다. 엄마는 책을 사줘도 읽지 않는 부류에 속했다. 내가 돈이 아주 없던 시절, 엄마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던 시집을 하나 사준 적이 있다. 표지만 몇 번 쓸어보더니 식탁에 올려놓고 한 번을 들어보지 않는 엄마에게 화를 냈다.


- 엄마 좀 읽어. 딸이(거지가) 산 건데.

- 읽었어.


거짓말하는 엄마는 배우인 딸을 속일 수 없다. 특히 엄마라서 더 미운 그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리모컨만 만지작 거렸고, 저자에 대해 대뜸 아는 척을 하며 나를 무시하는 걸로 대화를 끝냈다. 엄마는 끝내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다시 읽진 않지만 팔기도 아까운 부류로 분류된 그 책은, 침대 밑 먼지 이불을 덮은 채로 깊은 잠을 자는 중이다.

그 후 엄마의 갱년기와 나의 대학 졸업을 지나고, 서로가 적이자 동지가 된 어제보다 더 늙은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거실에서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손에는 정이현 작가의 <오늘의 거짓말>이 들려있었다. 리모컨이 아닌 책이라니. 당황할 새도 없이 엄마가 내게 물었다.


- 이거 실화야?

<오늘의 거짓말> 중 두 번째로 수록된 '삼풍백화점'에 대한 질문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 자전적 소설이라고 들었어.

- 어쩐지, 이렇게 잘 알 수가 없거든.


엄마는 애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동시에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자랑스러운 표정 또한 스친다. 엄마가 책을 읽다니.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모녀라니. 들뜬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 중 엄마가 관심을 가질만한 책들을 골라 엄마의 전용 자리인 다이닝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그 날 이후로 매일 저녁 책을 읽는다. 읽고 싶은 책을 사 오거나 빌려오는 것도 아니고,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그냥 읽는다니.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제나 한다면 하는 엄마이긴 했지만  목적이 있었다. 숟가락 마사지가 얼굴을 작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2 넘게 숟가락이 휘고, 닳을 때까지 마사지를 하기도 했고, 비타민과 각종 영양제는 하루도 빠짐없이 정량을 채워 먹는다.  번은 사랑이가 실수로 옆집에 들어가 왈왈 짖어댄 적이 있었다. 난데없는 강아지 출현에 놀란 옆집 여성은 날카로운 말로 엄마를 나무랐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밤새 모욕적이었던 말들을 되새김질하며 자신을 책망하고 사랑이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자 엄마는 사랑이를 원망하는 대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고, 매일  사람이 없는 시간에만 산책을 시킨다. 밖에서 왈왈 대는 소리가 들릴 때면  자리에 바로 앉혀 놓고 ' 되는 거야'라고 훈육하는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관리에도 철저하다. 나의 자전거로 출퇴근   2년이  되어가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탄다. 겨울에도 장갑을 끼고 타며,  오는 날에는 우비를 입고 탄다. 위험하다고 뜯어말리는 날에도 탄다. 대단한 여자다 정말. 독서도 똑같다. 엄마는 그냥 결심한 거다. tv 보는 대신 책을 읽기로. 단순 재미가 목적이면 좋겠지만, 매일  결단하듯 책을 읽어대는 엄마의 생각을  수가 없다.


 요즘 아무 걱정이 없다는 엄마는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취미를 찾는 중인지도 모른다. 엄마의 돈과 젊음을 빨아먹고 산 나는, 엄마가 '그동안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걸 왜 몰랐을까, 나는 왜 그렇게 바삐 살았나'라는 생각을 할까 봐 자꾸 눈치를 보게 된다. 책 읽을 여유 정도는 생긴 50이 훌쩍 넘은 엄마의 하루하루에 내가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10시부턴  집이 적막한 가운데 종이 넘기는 소리, 가끔 엄마의 핸드폰 소리만 울린다. 그동안 내가 바라 왔던 고요와 평화다. 물론  속은 다를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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