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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지 May 24. 2021

비 오는 날 당근하기

2021년 5월 20일 | 비

 제천에 있는 아빠는 산 중턱에 셀프로 지은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제천에 갈 때마다 어딜 방문하냐 묻는 지인들에게 스스럼없이 위 사실을 말하면 적잖이 당황들을 했다. 글로 적고 보니 나도 꽤 측은한 느낌이 들어 덧붙이자면 아빠의 전직은 건축가다. 분명 인부를 고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혼자' 지었기 때문에 천장도 낮고, 제대로 갖추어진 진 집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어 종종 놀러 간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느  아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새내기답게 이런저런 행사와  받기에 불려 다니느라 쁘던 때였다. 물론 엄마와 아빠의 오랜 상의와 합의 끝에 헤어짐이라는 결론을 얻은 였겠지만 자식인 나와 오빠에게 말해줄 여유는 없었던  같다. '그렇게 됐구나'라고 생각하고 각자의 생활을 이어가던 오빠와 나였다.


  아빠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집이 망했다. 30평대 아파트에서 10평대 반지하로 이사한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사랑을 할 때였고, 진로를 고민할 때였다. 1학년 겨울방학이었을 거다. 낯선 집에서 밤새 투니버스에서 틀어주는 심슨가족을 봤던 기억이 난다. 거실도 부엌도 아닌 공간에서 티비 앞에 앉아 30일가량 매일 심슨가족을 보다가 잠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막이 아닌 더빙으로 된 심슨가족을 틀어주는 투니버스에 분개해 투니버스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심슨가족의 미국식 코미디를 더빙으로 틀어주면 도대체 재미를 어디서 느끼냐는 식의 항의글이었다. 내 인생에 두 번은 없을 것 같은 심슨 분개 사건은 늘 부끄러운 기억 중에 하나다.


 놀기만 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고삼 때 연기 입시에 열중하기 위해서는 2학년 때까지 모의고사 등급을 확실히 올려놔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심슨가족 덕분인지, 중학생 때 외국인 친구와 펜팔을 한 덕분인지, 영어는 공부하지 않아도 늘 턱걸이로 1등급이 나왔고, 보기 중에 답을 찾아내는 능력을 길러준 논술학원 덕분에 사탐에서도 1등급을 하나 더 챙겨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1분 분량의 대사 하나로 1년을 준비하면서 늘 불안에 떨던 나에게, 대학은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것 같으니 쉬엄쉬엄 하라고 말해주는 이 하나 없었음이 억울하긴 하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그 반지하에서 살던 1-2년은 내 기억 속에 몇 가지 장면으로만 남아있다. 하나가 심슨가족이고 또 하나는 어느 비 오는 여름날이었다. 등교를 하려고 보니 비가 새차게 내리고 있었고, 불안한 마음에 신발장을 열어보니 멀쩡한 우산은 이미 오빠가 쓰고 나간 후였다. 말도 안 되게 크고 고장 난 우산이 하나 남아 있었지만 이걸 쓰고 학교를 가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자고 있던 엄마를 깨워 우산을 사게 돈을 달라고 외쳤다. 그 시절 엄마는 돈 얘기를 아침에 하는 걸 상당히 싫어했다. 왜 전날에 말하지 않았냐고 늘 우리를 구박했다. 구박할 것을 알기에 세게 나가기로 작정하고 외쳤던 것이다. 엄마는 돈을 주지 않았다.


 학교를 가지 않을 작정으로 집 앞에 서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빠가 차로 데려다주는 중이라고 했고 나는 우산이 없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다행히 차를 얻어 타서 학교에 갈 수 있었고, 집에 돌아오니 식탁에 3단 우산 하나가 놓여있었다. 13000원 가격 택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오늘 우연히 그 반지하 집이 있었던 동네로 중고거래를 하러 갔고, 비가 내렸다.


 도로명 주소라 낯선 동네로 알고 출발했으나 옛집이 가까워지니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예전에 살았던 집 바로 앞 집에서 네비의 안내가 멈췄다. 비가 내리고 어두웠지만 힐끗 본 옛집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바닥에 여성 안심 귀갓길이라고 적힌 것 빼고.

 주차장이 따로 없어 빽빽하게 들어선 차들 사이로 주차할 곳을 찾으며 눈물을 훔쳤다. 도착했으니 천천히 내려오라는 문자를 남기면서도 울었다. 막상 그 집에 살면서는 울거나 억울했던 기억이 없는데 오늘은 눈물이 주룩 흘렀다. 안경을 쓰고 우산은 쓰지 않으며 비를 맞는 찐따 컨셉으로 벌겋게 된 두 눈을 가렸다. 판매자는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이었다. 물건을 싣고 돌아가는 길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양배추를 사서 요리법을 물어보려고 했다는 아빠에게 예전 집을 보고 울컥했다고 말하자(울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빠는 침묵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빠를 미안하게 만들었다. 울컥했던 이유는 예전에 비해 지금이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아빠를 탓하는 말로 들렸을 까 봐 얼른 양배추 스테이크 레시피를 줄줄이 읊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 거래한 물건은 아빠의 집에 둘 식탁이었다. 늘 애매한 높이의 식탁이 아빠의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불편했었다. 아빠를 위한 건지 나를 위한 건진 모르겠지만 효도라 친다.


내일 아침에 바로 제천으로 가야지. 지금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와야지.


이제 자야겠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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