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두 번째 이야기
우선순위
내 얘기를 너무 안 했어요. 일단 나는 평범하진 않은 것 같아요.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는 캐릭터는 아니거든요. 물론 흑당 버블티도 때에 맞게 먹어봤고, 대왕카스테라 귀퉁이도 뜯어먹어 봤던 것 같고, 벌집 올려주는 아이스크림도 사 먹어 봤네요. 그래도 예측 가능한 평범한 스타일은 아니에요. 은근 사차원이라고 할까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잘 웃어요. 웃기대요. 재밌는 건 아니지만 웃기고 편하대요. 착하단 말은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말이 아니라 요즘은 들어도 못 들은 척 넘기지만, 살면서 꽤나 많이 들은 말 중 하나예요. 근데 착한 거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저 사람의 기분이 내 기분이 돼버리거든요. 저 사람의 상태가 내 상태가 되어버리는 매일을 겪다 보면 어떻게 되게요? 내가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밀려요. 저는 늘 2순위인 게 당연했어요. 어쩌면 1순위가 공석일 때도 난 늘 내 자리를 지켰어요. 누구라도 와서 그 자리를 채워주길 바라면서요. 나의 하루는 휩쓸리듯 주변인들에게 편승해서 흘러가요. 어제는 철없는 아빠 때문에 우울한 엄마의 기분을 달래주다, 엄마의 흐름으로 하루를 살았어요. 오늘은 엄마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Mr. Blue가 올랐네요. 아무리 이런 저라도 낯선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내주기는 처음이에요. 아 물론, 당장에 나보다 이 사람이 더 소중해져서 차에 ‘사고가 난다면 Mr. Blue를 먼저 구해주세요’ 스티커를 붙일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오늘은 그의 흐름으로 하루를 보내고 싶은 거죠. 발걸음을 맞추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 싶어요. 그가 잘 때 자고, 일어날 때 일어나서 같은 시간을 쓰고 싶어요.
아,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데요? 말을 걸어야겠어요. 왜 그런 뒤통수를 하고 있냐고 물을 순 없으니 그를 돌려세울 거예요. 눈을 보고 따질 거거든요. 공손해진 두 손을 풀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어요. 내 손에 파란 온기가 묻어요. 손에 살짝 힘을 줘서 내 쪽으로 그의 찬찬한 어깨를 돌려요. 인생에서 이렇게 용기를 낸 적이 있나 싶어요.
입이 얼어붙었어요. 그의 눈을 봤거든요. 눈이 마음의 창이라고 누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Mr. Blue를 보면 아마 이렇게 정정했을 거예요, 눈은 마음의 방패라고요. 그 어느 것도 그의 마음을 두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노크조차 안돼요. 방패에 가시가 돋쳐있거든요. 아무에게도 열어줄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눈이 까맣게 닫혀 있어요. 그런데 희한해요. 그 속에 제가 비쳐요. 손목까지 파래진 채로 멀뚱이 그를 올려보고 있어요. Blue가 짙은 두 눈에 몸이 얼어서 차마 손을 뗄 수가 없어요. 졌어요. 저는 그에게 내 하루를 걸어요. 기분, 시선, 시간이 그의 흐름대로 쫓아갈 거예요. 벌써 걱정이네요, 하루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무렴 어때요 저는 이미 그가 이끄는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는걸요. 저녁으로 뭐가 좋냐고 묻지 마세요, 당신이 좋아요.
Mr. Blue의 일기
오늘은 기분이 없는 기분이었다.
식욕이 없어서 식당을 고르지 못하고 인도도 차도도 아닌 애매한 길 위에서 도시에 불시착한 비둘기처럼 서성거렸다. 그때, 죽은 참새처럼 차갑고 작은 손이 느닷없이 나를 붙잡았다. 회사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더니 내 눈을 유심히 본다. 하는 수 없이 예의 차릴 요량으로 나도 누구지? 하는 표정으로 유심히 쳐다본다.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 텅 빈 위에서 북을 둥둥 거리며 내게 밥을 달라며 시위한다. 계속 둥둥둥 북을 쳐댄다. 둥둥거리는 소리에 집중하느라 어깨 위에 올려진 손에 대한 리액션을 하지 못했다. 내려야 할 타이밍을 놓쳤는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둥둥거리는 소리가 들킬 것 같아 두렵다. 일단, 떨어지자. 하는 수 없이 찬 손의 여자와 같이 식당으로 향한다. 하는 수 없이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묻는다. 대답이 없다. 나는 배가 고프니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문득 따뜻한 사발로 이 사람 손이라도 데웠으면 싶다. 뚝배기 같은 뜨거운 건 아니고, 따뜻한 사발. 적당한 온도의 국수가 괜찮겠다. 뭐지 내가 원래 이렇게 따뜻한 색이었나.
국수 두 그릇에 물만두가 나왔다. 고춧가루를 뿌리려다 멈칫한다. 이건 내가 시킨 건데 왜 눈치를 봐, 그냥 뿌려 난 매운 게 좋아.
“간장에 고춧가루 뿌리세요? 아니면 만두에? 아, 매운 거 잘 못 드시나.”
미쳤나. 처음 본 사람한테 내가 이렇게 예의 차리는 색이었냐고. 난 고춧가루가 좋잖아 그냥 뿌려. 아니면
“사장님 여기 간장종지 하나만 더 주세요.”라고 말해보던지.
이미 말했구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짧은 점심시간이라도 꼼짝없이 멈춘 것 같았던 엊그제가 전생처럼 아득하다. 촌스러운 트로트 가사처럼 시간이 야속하다. 점심시간이 이렇게 짧았었나.
분명히 오늘 기분이 없는 기분으로 나쁘지 않은 하루를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종잡을 수 없이 늘어난 개미 때처럼 간질거리고 알 수 없는 기분들이 넘실댄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는데 아차 싶다.
오늘 나 무슨색이었더라.
- 3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