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세 번째 이야기
블루 씨와 일기
제일 혐오하는 책은 베스트셀러 가판대에 위치한 파스텔 톤 표지의 에세이들이다. ‘빨간불엔 멈춰야 차에 치이지 않아요.’, ‘엄마와 아빠는 결혼한 사이랍니다.’, ‘외로운 이유는 혼자라서 그래요.’ 따위의 말들과 다를 바 없는 뻔한 말들을 나열한 책. 나른한 발걸음으로 서점에 도착해서, 느긋하게 그 책을 골라 드는 사람들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결핍이라곤 딱 그 책이 위로할만한 수준으로 겪어봤다는 거 아닌가. 마음의 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물줄기가 <언어의 온도>라는 댐으로 막아진다는 것.(혹시 저자인 이기주 님이 이 글을 보신다면 선물로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거지 딱히 악감정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아, 어차피 일기라 볼 일이 없겠구나) 그 책을 한 권 달랑 들고 계산대에 서있는 모습이 남들에게 걸릴 바엔 모비딕으로 뒤통수를 세게 맞아서 기절하는 편이 나을 거다.
힘들 때는 책이 땡긴다. 술과 잠도 세트로 곁들인다. 잠들 때까지 마시는 거다. 그러다가 애매한 시간에 깨면 별 수 없이 또 책을 읽는다. 해가 떠오르는 대로 빛을 찾아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파란 불꽃을 들여다보듯 잡생각이 사라진다. 빛을 찾아 휘어버린 목과,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치켜들어 고정한 팔이 뻐근하게 아파오면 책을 덮고 다시 자면 된다. 그러다가 출근을 하고 또 퇴근이나 야근을 하고 술과 잠 그리고 책. 그리고 일기. 탈인간화를 가속하는 거북목적 행동의 반복. 사실 거북이보다 못하다. 거북이는 빼낸 목을 도로 집어넣을 수라도 있지. 껍질이 닫혀버린 갯조개 정도 되려나.
마음대로 끄적거리는 이 글이 일기가 된 이유는 딱히 없다. 대상이 있다면 편지가 됐을 것이고, 독자가 있다면 맛있게 땡기는 글을 썼겠지만 그럴 재주도 시간도 없다. 어렸을 때부터 책이나 글짓기는 혐오했다. 글짓기 장려상이나 우수상 따위에 목숨 걸며 원고지를 채워나갔던 여자애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아직도 그렇게 작은 것에 인생을 걸며 집착하며 살고 있으려나. 그 대상이 그녀들의 애인이 아니길 바란다.
너무 더워서 지나가는 버스나 지나치는 상가가 에어컨으로 보이던 어느 여름날, 강남역 11번 출구를 나와 ‘이왕이면 무지, 이왕이면 무지!’를 속으로 외치며 나를 유혹하는 수많은 에어컨들을 뒤로한 채 무인양품 매장으로 입장했다. 적당한 시원함과 뇌를 깨우는 편백나무 향을 맡으며 땀을 식혔다. 남자 의류가 위치한 지하 1층으로 내려가서 애매한 핏들의 옷들을 대충 흘겨보다가 어떻게든 입겠다 싶은 무지 티셔츠를 두 장 골랐다. 그러다가 쓰임새에 따라 두께와 속지가 다른 공책들을 보고 갑자기 한 권 사고 싶어 졌다. ‘도대체 왜?’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 글을 쓴다는 표현이 간질거려서 대상도 독자도 없는 이 글을 일기라고 칭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떠난 직후니까 4년 전이었다. 그 해 여름은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웠고 이 정도면 온 지구가 ‘너네 다 죽어라 그냥.’하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후하 후하 들숨과 날숨을 반복해서야 겨우 산소를 공급받는 느낌이었고, 당연했던 숨쉬기에도 열과 성을 다하게 되느라 나는 숨쉬기만으로도 버거운 턱이 욱씬대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일기가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숨을 의식적으로 쉬지 않아도 숨쉬기가 가능해졌다. 그제야 내 호흡곤란이 미쳐버린 지구가 아닌 떠난 사람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작명가
‘*무도빠’라는 말이 창피해?
난 안 창피해. 나의 이 모든 센스는 무한도전을 보고 배운 거니까. 이 센스로 겨우 첫 여자 친구도 사귀었고, 회사에서 중박 정도는 기본으로 치는 유머센스도 자연스레 얻었다고. 아 물론 이런 걸 기대하고 무도빠가 된 건 아니지. 그냥 재밌으니까 본거지.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힌 에피소드 하나 말해줘도 돼? 봤나 모르겠어. 하하가 제대하고 나서 오랜만에 출연한 레슬링 편이었을 거야. 레슬러가 된 무도 멤버들의 이름을 짓는데 하하가 레전드를 찍었거든? 그러더니 행쇼에서 정형돈과 정준하의 자녀 이름 짓기에서 또 한 번 레전드를 찍었지. 정으로 시작하는 이름 아닌 모든 것을 대가며 정 씨들을 공격했어. ‘정수리 똥냄새’라니. 작명이 진짜 웃기더라고. 난 그때부터 스스로를 작명가라 칭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있지도 않은 자녀의 이름과 제2의 이름을 지어주며 웃음을 줬다고. 아차차, 회사에서 한 놈한테 지어준 별명은 거의 이름보다 더 유명해져서 이제 그놈 이름은 아예 사라졌어. 타 부서 사람들은 메일을 보낼 때도 내가 지어준 별명으로 부른다니까? 이런 식이야.
Mr. Blue 씨 팝업에서 아래와 같은 이슈사항이 있어 검토 요청드립니다.
거의 본명은 잊혔다고 봐야지. 응? 아, 왜 Mr. Blue냐고. 간단하지 그놈 별명 짓는 건 5초도 안 걸렸어. 그놈 일도 되게 잘하고 후배들도 희한하게 잘 따라. 사람을 챙겨주는 스타일은 아닌데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간지가 있거든. 내가 또 그런 거 엄청 질투하는 사나이잖니? 그래서 처음엔 작명도 안 해주고 난 좀 거리를 뒀어. 그런데 좀 떨어져서 보니까 그놈 꽤 우울한 면이 있더라고? 내가 삼수할 때 약 먹어가면서 공부한 거 아나? 나 가정의학과에서 한 3-4개월은 약 받아먹었을 거야 아마. 그래서 알거든 우울한 게 뭔지. 그거 그냥 슬픈 이모티콘 같은 표정 짓고 일도 못하고 빌빌대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상태거든 상태. 평생 가져온 습관처럼 지울 수가 없는 병이야. 치료가 정말 약 없이는 불가야. 근데 그놈이 일도 잘해, 지각도 안 해, 사람들한테 이쁨도 받아. 근데 눈이 텅 비었어. 눈이 닫혀 있다고 해야 하나 생각이 안 읽혀. 또 등에는 가시가 돋쳐있어 무슨 고슴도치처럼 등 돌리고 서면 부르질 못하겠어 내가 찔릴까 봐. 그래서 아, 우울의 결정체구나 이놈. 널 Blue라고 불러야겠다. Mr. Blue다 요놈. 이랬지. 사실 그 우울함 없었으면 그놈이랑 말도 안 텄지. 왜긴? 질투 나잖아 그 정도 핸디캡은 있어야 같이 놀지. 어쩌면 나를 위한 별명이었을 수도? 요즘은 그 별명 때문에 더 인기가 늘어서 약간 질투 나지만 내가 지어준 별명이니까 뭐, 좋아 난. 아, 이제 전화 끊어야겠다. 점심시간 곧 끝나. 안녕!
오, 잠깐잠깐 Mr. Blue 보인다.
헐, 여자랑 있는데?
아니 잠깐만, 웃어 저놈.
* 무도빠: 인기리에 종영한 무한도전의 빠순이, 빠돌이를 일컫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