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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킴 Jan 30. 2021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

난생 처음으로 물 위에 뜨다

이튿날도 아빠는 아침 일찍 나가고 혼자만의 여행이 시작됐다. 민소매 티셔츠에 핫팬츠를 입고 다이아몬드 헤드로 향했다. 뚜벅이 여행객이라 버스를 타니 화산 아래 기슭에 내려준다. 이때만 해도 내가 땡볕 아래에서 얼마나 더 걸어야하는지 몰랐다. 명색이 화산인데, 왜 높을 거라고 예상을 전혀 못 했을까.


다이아몬드 헤드 트레일은 분화구 안에서 출발한다. 움푹 파인 면적이 아주 넓어서 주차장과 방문자 센터가 분화구 한 가운데에 있고 거기서부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이 이어진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에서 물도, 모자도 없이 호기롭게 등산을 시작했다. 완만한 흙길이어서 힘들진 않았지만 작열하는 태양 아래 가릴 것 없이 드러난 어깨가 타들어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뜨겁고, 뜨겁고, 뜨거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굴과 절벽을 따라 아주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좁은 나선 계단을 올라가자 탁 트인 야외가 나왔다. 다이아몬드 헤드 정상에 서면 한쪽으로는 호놀룰루 시 전경이 보이고 그 옆으로 와이키키 해변과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바닷물이 이런 색이구나..


일행이 없는 사람은 나뿐인 듯 했다. 다들 바다와 시내를 배경으로 서로를 찍어주며 정상에 오른 기쁨을 사진으로 남기는 동안, 어떡하랴, 혼자인 나는 그저 팔을 양껏 뻗어 얼굴이 사진 절반 가까이 차지하도록 셀카를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낮은 땅으로 돌아와 수영복을 갈아입고 해변으로 두두두 달려갔다. 빨갛게 익은 몸을 진정도 시킬 겸 바닷물에 풍덩 몸을 담그고 신나게 놀았다. 이날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처음으로 온몸이 물에 떴다. 아주 어릴 때 수영을 배우기도 했는데 어느샌가 왠지 모르게 물 공포증 같은 게 생겨버렸다. 그래서 친구들과 캐리비안 베이에 가면 수심이 조금만 깊어져도 버둥거리면서 겁에 질렸던 내가, 스스로, 내 몸뚱이를 물 위에 띄울 수 있게 된 거다.

바다에서는 염분 때문에 사람이 더 쉽게 뜬다는 걸 이론적으론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내가 뜰 줄은 몰랐다. 또, 물에 뜨는 게 몸집이나 몸무게와는 상관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막상 푸짐한 몸매의 미국 할머니들이 둥둥 떠다니면서 놀고 있길래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아니 그럼 솔직히 나도 돼야 정상 아냐?’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충 따라해봤다. 일단, 꼬르륵 가라앉아도 절대 죽지 않을 정도로 얕은 곳에 서서, 물 표면에 눕는다는 기분으로 몸을 뒤로 제끼고 ‘나는 몸에 힘이 없다, 나는 몸에 아무 힘이 없다’를 되뇌이면서 축 늘어지니까, 어라? 뜨네..? 뜬다, 뜬다! 떴다!! 어떻게 된 건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정말로 몸이 물에 떴다!


갑자기 자신감이 샘솟았다. 맥주병이 물개로 거듭나는 순간! 본디 수영을 잘 하는 사람도 모를 것이고, 수영을 못 하는 사람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 짜릿한 기분을 나로서도 도저히 형용할 방법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걸 남한테 배워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나 스스로 터득했다는 게 그렇게 뿌듯하고 대견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중독된 듯 계속 물 위에 둥실둥실 떠있기만 했다.


아무리 하와이라도 1월은 겨울이다. 물에 떴다는 충격적인 기쁨 때문에 몸이 차가워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순간 으슬함을 느끼고 뭍으로 나왔다. 숙소로 돌아와 씻으면서 보니 위아래로 비키니 자국이 선명하게 났다. 마치 물에 뜨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 자에게 주어지는 훈장 같았다.



저녁을 먹기 전 쇼핑을 했다. 대형 할인 쇼핑몰을 검색했더니 관광지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사는 한적한 동네에 있었다. 일본인이 너무 많이 보여서 재팬 타운쯤 되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하와이에 원래 일본인 이민자가 많은 거였다. 이 섬에 일본인이 얼마나 많은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언어다. 미국 본토에서는 영어 다음으로 스페인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데, 하와이에서는 그 대신 일본어가 쓰인다. 본토의 음식점이나 마트에서 직원들이 간단한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여기에선 일본어 인사, 숫자 등을 기본적으로 구사한다. 게다가 버스 안에 영어와 일본어가 병기되어 있어서 정말 신기했다. (본토에서는 거의 모든 안내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표기된다.)



여담으로, 내가 생각하는 여행객으로서 궁극의 현지화는 지도 없이 걷는 것도,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대중교통 안에서 자는 거다. 외국에서 버스나 지하철, 트램 타면 얼마나 긴장되는가. 소매치기를 당하지는 않을까, 내릴 곳을 지나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들로 꾸벅 졸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기 일쑤지 않은가.


맘에 드는 나이키 운동화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에 탄 나는, 긴장도, 두려움도 모두 내려놓고 쿨쿨 잤다.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꿈을 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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