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가족은 있습니다
부모의 맞벌이
나는 부모님의 맞벌이로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삼촌과 함께 살며
시간을 보내왔다. 할머니의 가족과는 부모님이 퇴근하시기 전까지 잠깐 있었던 게 아니라 아예 같이 살았고, 반대로 부모님을 주말에만 잠깐 보는 식이었다. 길게 보면 금요일 저녁부터 포함해 3일, 짧으면 그 주말도 못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까지 근 20년을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삼촌과 지내며 자랐고 그 시간 동안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춘기
아침마다 지금 안 일어나면 늦는다고 계속 깨웠음에도 불구하고 5분만 하다 결국 늦었을 때 되려 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않았냐며 할머니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때.
계단에서 뛰면서 장난치다가 결국 발목을 크게 접질려 통깁스하게 된, 비만인 나를 휠체어로 몇 달간 등하교해 주신 왜소한 할아버지.
일 때문에 잦은 야근을 하는 삼촌에게 언제 오냐며
그냥 빨리 와서 같이 저녁 먹자고 떼쓰고, 갖고 싶은 거안 사주면 이것도 못 사주냐면서 비아냥거렸던 내가 있었다.
한창 중2병과 사춘기이었던 그때는 별 쓸데없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짜증이 났고 화가 났다. 맞는 말이어도 맞는 말이라서 듣기 싫었고, 괜히 대들고 싶어서 상처가 될 거란 것을 알면서도 말대꾸를 했다. 논리가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그냥 내가 하는 말이 다 맞고, 내가 옳다고 우겼다. 그러면서 스스로 다 컸고, 이제 나도 어른이고 성숙해졌다며 어린애 취급 하지 말라며 건들지 말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 뭐 하나 안되거나 부족하면 왜 안 도와줬냐고 남 탓했다.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했다고 투덜대고, 저렇게 하라고 해서 저렇게 해도 아니라고 징징댔다. 무엇이 불만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는 없고 ‘그냥’ 싫었다고만 반복했다. 싫은 것도 싫은 티를 팍팍 내고, 기분이 상하면 실제 느끼는 감정을 몇 배로 키워 괄괄거렸다. 일관성이란 건 1도 없이 다 내 마음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참 지랄 맞았다. 그때는 나밖에
몰랐다. 감정에 예민했고, 이기적이었다.
사춘기가 지나 정신을 차렸다고 볼 수 있었을 때 늘
생각만 하면 혼란스러웠던 하나의 물음에 답을 찾게 되었다. ‘내 가족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내 대답은
부모가 없는 가족
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족 소개나 가족 그리기를 할 때
엄마, 아빠를 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들 엄마, 아빠를 그리면서 우리 엄마는 ~ 우리 아빠는 ~ 하면서 소개하는데 나는 엄마, 아빠에 대해 아는 게 없어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가족을 ‘현재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소개를 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럼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이 내 가족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을 그리면서 엄마, 아빠도 그릴 수 있었지만 ‘가족’이라는 형태에 굳이 넣고 싶지 않아 단 한 번도 그린 적이 없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즉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하니까
떨어져 사는 거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떼를 쓰지도,
반항을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 혼자 있을 수는 없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뭐 더 정확히 따지면 혼자 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못 보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에 엄마, 아빠를
이번 주에 보지 못한다 해도 그러려니 했고 더 솔직히 는 그렇게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엄마, 아빠를 보는 날은 가끔의 주말 아니면 체육대회, 학예회, 부모님
참관수업 때였다. 이런 날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 왜소하신 할아버지, 현장직이었던 삼촌이
올 수 없으셨으니까.
이쯤에서 어떤 이들은 나에게 ‘정이 없다’, ‘어떻게
엄마, 아빠한테 그럴 수 있냐 ‘,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정 없다
나는 이런 말들을 많이 들어서 나도 이런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 여겼다. 맞벌이가정이 얼마나 많은데, 맞벌이라도 다른 가족은 그렇지 않은데 왜 나만 애틋함이 없지?라는 생각을 정말 수도 없이 매순간순간 한 번도 안 한날이 없을 만큼 계속 생각했다. 매일을 내가
이상해서,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아직 어려서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어쩌다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그것도 아예 반대로.
결국, 같이 살면서 나는 그동안 뭐라 정의하지 못했던 물음의 답에 결정적인 근거들을 찾게 되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모의 말
부모로서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우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 기껏 키워났더니 소용없네
-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대체 뭔데
- 이것도 못해주니, 이것밖에 안 해주니
- 나는 너를 생각해 주는데 왜 너는 나를 생각 안 하니
-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데
- 그게 부모한테 할 소리니
- 어디서 버릇없게 말대꾸야
-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왜 기분이 안 좋은데
나에 대한 비난과 비판
- 아직도 그럴 거야?
- 정신 차려라
- 네가 이래서 문제다
- 다른 사람은 안 그래, 너만 그런 거야
- 어쩌다 네가 이렇게 자랐을까 참 안타깝다
-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네, 이럴 거면 뭐 하러 하니 - 쓸데없이, 생각 없이
- 답답하게 굴지 말고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말해
- 네가 할 줄 아는 게 뭔데?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 네가 아직 어려서, 사회생활을 아직 안 해봐서
모른다
- 더 때렸어야 했는데, 잘못 키웠다
- 참 별나다
내가 들었던 말들은 가끔 갔던 주말과 성인이 되어
같이 살았던 대학시절 동안의 일이었다. 이 시간으로 나는 그들과 이런 사이가 된 게 맞벌이여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편으로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만 이상하고, 유별나고, 예민한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계속
있다가는 내가 나를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뭐 하나
특별한 거 없는 나이지만 이런 나라도 나는 소중해서 어떻게든 나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번듯한 직장도 모아둔 돈도 없지만 그저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내 가족을 위해서.
가족을 생각하면
다른 이들은 부모님을 생각하면 느끼는 감정을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에게 느낀다. 가족을 생각하면 미안함, 애틋함, 벅참, 감동, 고마움 등 아주 복합적인 감정이 떠올라 결국 눈시울이 붉어지고 언제나 울컥해진다.
내가 뭐라고,
그리도 사랑과 애정을 주려고 온 힘을 다했나.
없는 살림에도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려 하였고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덤벙거리는 나였지만 이들은
누구보다 괜찮다고, 큰 일 아니니까 다시 하면 된다고 해주었다. 이걸 왜 못하냐며 답답하고 짜증도 날 법한데 내 옆에서 내 속도에 맞추어 같이 걸으며 나를 놓지 않았다. 느리지만 끝내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해낼 수도 있었다. 내가 나를 못 믿을 때 혹은 자책할 때면 결과에 비난하는 게 아니라 했던 노력을
알아주었고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믿어주었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는 누구보다 잘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 평생 고마움과 미안함과 애틋함을 가진 채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보잘것없는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보란 듯이 해낼 것이고 무조건 성공할 것이다. 덕분에 내가 해낼 수 있었다고 언젠가 세상을 향해 말할 것이다. 이게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이자 내가 사는
단 한 가지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