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은 수치스러우나 ‘성장’하기 위해서
자존심이 센 건지, 혹은 진다고 생각하는지 든 어떤 이유든 간에 ‘인정’하는 게 죽어도 싫었다. 나에 대해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 같았고, 스스로 혜안을 가지고 있다 말하는 잘난 척하는 것도 꼴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아니라 했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내가 한 거지만 하지 않았다고 했고, 맞지만 틀렸다 말했다. ‘인정’하면 우쭐댈까 봐.
무작정 아니라고만 하니 누구는 나에게 자존심이 세다 말하고, 또 누구는 억지 부리지 말라하고, 다른 누구는 고집이 있다고 말했다. 자존심, 억지, 고집. 이런 단어들은 여러 핑계 대며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람, 자기 말만 맞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사람이라 느껴지는데 그런 사람이 나라는 게 싫었고,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잘난 척하는 이들이 꼴 보기가 싫어서 한 행동인데, 그런 사람보다 내가 더 이미지가 안 좋은 게 이상했다.
그래서 ‘인정’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어보려 했다. 근데 마음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내 모습과 실제의 나는 차이가 있고, 꼴불견이라 생각하는 그런 사람보다 내가 더 부족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죽어도 싫었다. 죽어도 인정하기엔 싫고, 인정을 안 하기엔 평판이 안 좋아지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그만큼 나는 ‘인정’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앞서 언급했듯, 아는 척하고 잘난척하는 그들의 생각을 내가 동의하면 그전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던 나보다 이미 그 생각을 한 타인이 우월감을 느끼고 나를 무시하고 얕잡아볼 것 같았다. 이런 사고방식이 내가 만든 피해의식, 자격지심이라 해도, 또는 자존심, 억지, 고집이 나라고 해도 괜찮다. 그들에게 ‘인정’만 안 할 수 있다면. 나에게 ‘인정’은 마치 굴복하는 것과도 같았다.
근데, 이상하지 않는가.
‘피해의식, 자격지심, 자존심, 억지, 고집’은 인정해 버렸다. 어느새 그렇게 보여도 괜찮다 했다. 처음에는 이 마저 인정하기 싫어서 아니라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보는 건 괜찮고, 잘난 체 하는 그들의 말에 ‘인정’하는 게 싫단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미 인정했으니 끝이라 생각했다. 그간 부정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인정’만 하면 끝날 일인걸. 그렇게 스스로 인정해 버렸고
남은 하나, 꼴불견인 사람들.
나에 대해 아는 척, 잘난 척하는 이들에게 ‘인정’하기.
사실 그들이 던진 말에 정곡을 찔린 적이 많았다.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나의 결핍을 장난으로 포장하며 과감 없이 들춰 부끄러웠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수치심을 느꼈다. 나를 그런 싼 입에 놀리는 게 재미있나? 그들이 나를 밀어버리려 하면 나는 밀리지 않기 위해 맞섰다. 되받아치고, 우겼다.
근데 이미 뭐, 나를 인정해버리지 않았는가. 내가 나를 이미 인정했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 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래서 맞다고 했다. 다만, 사실인 일에만.
내가 실제로 했던 말, 행동에만 인정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저렴한 유머에는 휘발되게 아무 말 안 한 채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제가 언제 그랬나요?”를 던지고 한마디로 사실을 말했다.
사실인 말은 어차피 사실이니 부정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닌 시답지 않은 말은 대응할 가치가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