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만큼, 필요한 것만, 있는 그대로
1. 할 수 있는 만큼
시간만이라도 알차게 쓰자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누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돈이 많거나 아니면 타고난 천재라 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 나는 그들의 출발점이라도 따라잡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이 몇 없는, 극 소수라고 해도 내가 그 극소수로 태어날 수도 있는 건데 왜 나는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나 싶어 세상에 대한 억울함이 있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불만이었고, 그 후에는 내가 한번 따라잡아보겠다는 오기, 그리고는 받아들임과 체념 그 사이 어딘가에 어중간하게 머물러있다.
어느 날은 ‘이미 태어난 걸 어쩌겠어’하다가도 ‘왜 나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내가 노력해서 따라잡아보자’했다가도 ‘그들은 노력 따위 안 해도 되는데’라는 굴레에서 허우적댈 때 대단하고도 부러운 그들과 내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 태어나고 지금까지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하나 있다는 말에 솔깃해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니 ‘시간’이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반대로 돈이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도 그들과 내가 아직까지도 똑같은 건 ‘시간’뿐이었다. 시간의 가치는 다를 수 있겠지만 다행히 ’양‘은 같았다. 아무리 노력한대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들과의 격차와 태어난 순간부터 다른 출발점으로 시작한 억울함에서 오는 좌절을 겪다 보니 ‘하나라도’ 그들과 같은 게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과 공평하게 주어진 것만큼 더 쪼개서, 알차게 쓰고 싶었다. 시간의 값어치가 달라 나는 부지런히 바쁘게 움직여야만 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도 나는 ‘그들과 다르게’ 시간을 ‘쓸모 있게’ 쓴다고 생각해서라도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어느 것도 내가 나은 게 없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들어오는 대로, 되는 대로 다 한다고 했다. 다들 하기 싫어하는 것도, 떠넘기고 싶은 것들도 다 나서서 했다. ‘나는 너네와 다르다’를 시간의 촘촘한 짜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2. 필요한 것만
어릴 때부터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있었다. 비싼 것을 추구하는 물욕의 의미가 아니라 양에 대한 욕구. 무조건 많이 가지고 싶었다.
예를 들어 같은 값에 브랜드의 옷 한 벌과 보세의 여러 벌이 있다면 당연히 ‘여러 벌’을 선택할 것이고, 고급 음식 한 접시와 푸짐한 음식 중 고른다면 ‘푸짐한’ 음식을 고르는 것처럼 ‘양이 많은 것’을 좋아했다.
가지지 못한 것에 한이 맺힌 것도 아닌데 무조건 많은 게 좋았다. 심지어는 나중에라도 안 먹을 것 같은 것도 일단 넣어뒀고(썩을 때까지 그냥 둠), “이걸 왜 모아 대체?” 하는 어디에도 쓸 데가 없는 것조차 다 모으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 때 수업시간에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낙서했던 종이 쪼가리, 공부 잘하는 친구가 이미 푼 문제집, 잘못 적었지만 지울 수 없어 결국 이면지가 되어버린 포스트잇 같은 것들. 그 하나하나에 그렇게까지 정성과 추억이 있지 않은데도 티끌처럼 다 쓸어 담았다. 나는 그렇게라도 많은 걸 가졌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을까?
3. 있는 그대로
스스로 별 거 없다고 생각하니 보이는 것만이라도 뭐라도 있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속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지만 뭐 대단한 거라도 있는 것처럼 하고, 다 보이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닐 수도 있다며 마치 대단한 걸 숨겨놓고 있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확신에 찬 거짓말도 했다. 처음에는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성으로 유도하다 안되니 나중에는 없으면서 있다고, 안 했으면서 했다는 확신을 내뱉어버렸다. 앞서 추측 같은 경우는 확실하게 하지 않고 여지를 남겼기 때문에 얍삽하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지만, 없는 걸 있다고 해버리면 사실이 아닌 거짓이 말한 거기 때문에 명백한 ‘사기’였다. 다행이랄지 그런 치밀함은 내 능력을 벗어났기에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금방 들통나버렸다. 부풀리게 만들면 순간은 커 보이나 결국은 터져버리는 풍선과도 같다는 걸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