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회회관 <박신양의 전시쑈: 제4의벽>을 다녀와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배우이자 화가 박신양의 전시는 단순한 회화 전시가 아니다. 감상의 조건 자체를 문제 삼는 하나의 실험이다. ‘쑈(show)’라는 도발적 명명은 장르 혼합을 예고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대 미술에서 장르의 경계 해체는 이미 낯선 전략이 아니다. 이 전시가 도달하는 지점은 그 너머다. 중심에는 ‘그리움’이 있다.
박신양에게 그리움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결핍의 언어가 아니라 사유를 작동시키고 행동하게 하는 힘에 가깝다. 그는 무엇인가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어디로 밀어내는지를 끝까지 따라간다. 그리는 작업은 해답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질문의 흔적이다. 왜 우리는 그리워하는가. 그 감정은 무엇을 향하는가.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이 질문은 자화상 연작에서도 드러난다. 에곤 쉴레, 피나 바우쉬, 이중섭의 초상화만큼이나 박신양 자신의 자화상에도 자신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태도가 흐른다. 그의 자화상은 배우의 얼굴이 아니다. ‘그릴 수밖에 없는 존재’의 초상이다. 그림 속 ‘선(line)’은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감정의 궤적이 된다. 형태는 결과일 뿐, 본질은 그 선이 표현하는 감정에 있다.
전시의 중심 모티프 중 하나인 ‘당나귀’는 자화상의 변형된 형태다. 당나귀는 꾀를 부리지 않는다. 느리고 무겁게, 묵묵히 짐을 진다. “그가 지는 짐이 그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이해되는 정도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문장에 가깝다. 반박하고 싶지만 끝내 그 문장을 통과하지 못한다. 책임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삶의 무게가 조용하지만 깊게 투영되어 있다.
사과는 감사와 존경, 그리고 또 다른 그리움이 응축된 대상이다.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사과는 반드시 우리가 아는 ‘사과’처럼 보여야 하는가. 이 질문은 유년기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정답’이 아닌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질책받았던 기억은 오랫동안 예술을 규칙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다운 사과로 재현을 거부한다.
박신양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과 같은 뜻일 것이다.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길일 뿐이다.
25,000년 전 동굴에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나는 있다.
‘퀀텀 점프’. 드물게, 사람은 단번에 다른 궤도로 이동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박신양의 이번 전시는 그 도약이 우연이 아니라 축적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감동을 만드는 건 재능이 아니라, 끝까지 감당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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