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사랑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사랑

by 강준혁

사랑의 완성은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결혼식을 사랑의 절정이자 하나 됨의 선언으로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쩌면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걸림돌일지도 모른다. 이 장에서는 사랑의 시선으로 결혼을 바라볼 것이다. 다소 비판적인 태도로, 사랑과 결혼이 정말로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만약 과학에서 과학적 법칙이 반복적으로 어긋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법칙'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중요한 원칙이 ‘상대의 자유를 사랑하는 일’이라면, 결혼은 그 원칙에 위배되며, 우리는 그것이 여전히 사랑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사랑의 핵심 원칙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면, 결혼은 그 원칙을 위배한다. 우리는 과연, 그 안에서도 여전히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문제는 결혼을 선택한 개인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이지만, 결혼은 단지 그 사람과의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역사적 배경을 돌아보면, 결혼은 그저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는 의식에 그치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의 결혼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맺어진 사회적 계약이었다. 결혼은 가족 간의 동맹을 형성하고, 재산을 이어가며,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업 혁명이 일어난 후, 결혼은 개인의 감정과 자유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사회적 책임과 법적 구속력이 함께 존재했다. 이처럼 결혼은 사랑의 결합을 넘어, 사회적 역할을 강하게 내포하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특히 가족을 이루고, 후세를 남기는 일이 결혼의 중요한 목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결혼은,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되짚어보면, 결혼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해 온 구조로 기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결혼을 통해 그 사람의 가족과도 연결되며, 사회적 기대와 법적 책임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부부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내 아내’ 또는 ‘내 남편’이라는 역할을 부여받고, 때로는 ‘아이의 부모’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결혼은 서로를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라는 고정된 역할 속으로 옮겨놓는다.

법적으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이제 각자의 자유로운 결정보다 사회적 기대와 법적 의무에 더 크게 얽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 이후 경제적 책임이나 자녀 양육과 같은 현실적 문제로 갈등이 생길 때, 그 관계는 감정적 결합을 넘어선 ‘책임의 무게’로 변해버린다.


약속과 책임, 의무감 같은 것들이 감정 위에 군림하는 순간, 사랑은 이미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감정이 사라진 채 약속만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결국 사랑이 아닌, 형식만 남은 의무적 관계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는다.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약속’만이 진정한 약속이라고. '지켜져야만 하는 약속'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자율성을 침해하는 강제된 구속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결혼은 두 사람을 법적으로 하나의 완성된 관계로 고정시킨다. 이제 그들은 ‘나와 너’가 아니라, ‘아내와 남편’이라는 제도적 호명 안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 호명은 곧, 일정한 윤리와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우리를 환원시킨다. 내가 사랑했던 건 그 사람 ‘자체’였다. 하지만 결혼은 그 사람을 ‘배우자’라는 기능으로 바꾸어 놓는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라는 말속에는 보이지 않는 평가 기준이 숨어 있다. 무엇을 해주어야 하고, 무엇을 감당해야 하며, 어떤 식으로 책임져야 하는지가 말없이 정해져 있다. 우리는 점차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방점을 찍게 된다. 그 사람의 이름이 희미해지고, 고유성은 점점 흐릿해진다. 이제 관계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유지되기 시작하고, 어느덧 사랑은 하나의 역할극으로 변질된다.



조금 차갑게 표현하자면, 결혼은 두 사람이 완벽한 파트너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결혼을 완수해야 할 과제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 그 자체'보다 그 사람이 가진 외부 조건에 더 주목하게 된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 부모는 누구인지, 장남인지 차남인지, 제사를 지내는지. 마치 면접을 보듯이, 우리는 서로를 조건화하고 평가한다. 회사에서 직원을 뽑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보다는 학력과 경력을 보듯이. 결혼은 그렇게 사랑을 점점 '기능'으로 환원시킨다. 안정보다 감정, 현실보다 끌림이 먼저였던 그 사랑은, 어느새 스스로의 손을 놓는다. 그렇게 우리는 역할을 완성하고, 사랑을 잃어버린다.


결혼이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결혼을 하나의 '성공'으로 만들고, 결혼 자체를 상품화하면서, 이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로 강요된다. 우리는 사랑을 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그것을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오히려 사랑 없는 결혼이 당연한 선택처럼 요구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결혼정보회사들이 우리의 불안을 자극하며 손을 끌어당기는 시대. 결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처럼 포장되는 사회. 우리의 불안은 철저히 이용당한다. 그 결과, 결혼식은 이제 축하의 장이 아니라 거대한 비용이 드는 행사로 변질됐다. 축의금과 식사가 거래처럼 맞바뀌고, 축의금을 충분히 내지 못한 사람은 식사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예의’처럼 굳어졌다. 이 결혼식이 과연 사랑의 완성이고, 축하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까?


결혼 후에는 사랑과는 무관한 수많은 현실이 두 사람을 덮쳐온다. 결혼 후 발생하는 경제적 책임, 사회적 시선, 법적 의무 등은 사랑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감소시키고, 결국 감정적 소진을 초래한다. 이처럼 결혼은 단순한 사랑의 결합을 넘어서는 다양한 부담을 수반하며, 이는 사랑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사랑은 점점 옆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책임과 의무가 대신한다. 자녀 양육, 경제적 부담, 양가 부모에 대한 태도, 명절 계획, 보험, 대출, 주택 문제. 사랑은 이 모든 현실 사이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유부남" "유부녀"라는 호칭과 함께, 그들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배지가 새겨진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귀속되었음을 공표하고 사회적 책임과 법적 의무를 함께 짊어지게 된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둘만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없다. 관계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장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누군가를 함께 책임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그 모든 구조가 감정을 덮어버릴 때, 관계는 하나의 ‘유지해야 할 시스템’으로 굳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관계를 지킨다’는 말의 무게를 감당하는 데 익숙해져 간다. 어느새 관계는 '자유' 보다는 '소유'에 더 가까운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앞의 장에서 말했듯이, "No"와 "Yes"를 모두 말할 수 있는 사람의 "Yes"만이 진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결혼이 부과하는 책임감은 ‘No’라고 말할 권리를 점점 희미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 역할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고, 그 요구는 사랑의 자유를 서서히 잠식한다. Yes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책임도, 사랑도, 모두 ‘스스로의 것’이어야만 한다. 연애를 할 때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은, 회사를 그만둘 자유도,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갈 자유도, 심지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자유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가진 자유를 사랑했고, 그리고 그 자유로 인해 생겨나는 고유한 분위기를 사랑했다.


그렇다면 결혼한 상태에서도 상대방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 배우자가 며칠 동안 여행을 간다면, 내 배우자가 내 가족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한다면, 맞벌이를 하던 배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거에는 가능했던 일들이, 결혼이라는 구조 속에서는, 곧 균열의 조짐 혹은 책임의 회피로 읽히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이고, 한 사람이 일종의 '포기'를 선언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행위로 간주된다. 심지어 이혼을 결심할 때는 함께한 시간들은 ‘자료’가 되고, 그 기억들을 근거 삼아 서로를 계산하고 공격한다. 사랑을 정리하려는 순간, 감정은 문서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혼 후엔 자신에게 붙은 차가운 꼬리표와 사회적 시선까지 감당해야 한다. 깔끔하게 이별하면 그만이었던 연애와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다.


물론, 결혼이 사랑을 공고히 해주는 안정적 틀이라고 믿는 시각도 있다. 누군가에겐 그 틀이 진짜 안정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제도적 안정은 결코 사랑의 본질을 대신할 수 없다. 제도에 기대어야만 유지되는 사랑은, 이미 자발성과 자유로부터 멀어진 사랑이다. 결혼이 사랑을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책임과 역할을 부여하는 구조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태어나는 아이 역시 하나의 ‘미션’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아이의 입장에서 먼저 고민하기보다는, 부모가 ‘자녀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아이가 태어난다. 관계가 어떻든 간에 아이를 가지는 것이 ‘결혼의 핵심 목표’가 된 부부에게, 아이는 결국 실행해야 할 가장 큰 미션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종종 차가워진 부부 사이에서 "너 때문에 산다"는 무게를 짊어지며 자란다. 맞벌이가 보편화된 지금, 아이를 바라볼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 양쪽 모두에게서 방치되며, 한 번도 따뜻한 애정을 느껴보지 못한 채 성장한다.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 이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현실의 차가움을 온몸으로 겪게 될 것이다. 그 상황에 자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조차 따뜻하지 않다면, 아이는 세상 어디에서도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아이가, 한 생명이 어떻게 목적이 될 수 있을까?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몸의 뒤섞임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의 결과여야만 한다고. 아이는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가 아니라, 우리가 아이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결혼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함께 짊어져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렇게 서로는 어느새 하나의 습관 같은 관계가 되어간다. 우리가 흔히 듣는 “정으로 산다”, “의리로 산다”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함께 있을 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지만, 막상 없으면 허전한 관계. 한 시인은 결혼 후의 관계를 ‘가구’에 비유했다. 눈에 띄는 기쁨을 주진 않지만, 고장 나거나 사라지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존재. 세월이 흐를수록 서로는 서로에게 가구처럼 자리를 잡아간다. 더 이상 서로에게 특별한 설렘을 주지는 않지만, 법적 구속력과 사회적 책임 속에서 묵묵히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어떤 제도적 도움도,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증명을 필요로 하는 사랑은, 어쩌면 이미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어떤 감각으로 다가오는가를 통해서만 존재를 증명한다. 결혼 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는 점차 하나의 역할로 굳어져 간다. 역할은 책임이 되고, 책임은 무게가 된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극도로 심화된 이 시대에 우리는, 사랑할 시간도, 사랑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다. 더 많은 책임감, 더 많은 정신력.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사이, 사랑은 무대 중앙에서,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점점 밀려난다.


습관처럼 굳어가는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스스로를 깨워야 한다. 얼어붙어가는 관계 위에, 끊임없이 따뜻한 물을 끼얹어야만 한다. 얼어붙지 않도록, 굳어가지 않도록, 계속해서 살피고 끊임없이 갱신하려는 관심과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여전히 서로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어야, 관계는 굳지 않고 흐를 수 있다. 관성처럼 지속되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매 순간, 내가 이 사람을 다시 선택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는 일. ‘지켜야 해서’ 지키는 관계보다는, ‘지금도 여전히 지키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태도. 그 태도만이 관계를 살아 있게 한다. 상대가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유가 과거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원하고 있다는 감각에서 출발할 때, 그 관계는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희미해져 가는 상대의 모습을 다시 선명하게 바라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중. 익숙함 속에서 굳어가는 서로의 역할을 깨부수고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보려는 태도. 삐걱대는 관계를 다시 맞추려는 작은 순간들이 쌓인다면, 서로가 서로를 향해 끝없이 손을 뻗을 수 있다면, 사랑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랑으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결혼이 가진 그 제도적 힘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시선은 분명 사랑의 공간을 갉아먹는다. 더 좁아진 공간을 더 자유로워진 공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듯이, 결혼은 분명 사랑을 시험하는 어려운 장애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그것을 함께 넘어서며 확인되는 사랑의 가치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깊고 단단할 수 있다. 사랑이 어떤 제도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제도 안에서 서로의 고유성을 지켜내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감응이 된다. 결국, 우리가 어떤 구조 안에 있든, 사랑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태도에서 달려있을 것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늘 같은 질문을 남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 사람을 원하고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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