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몸

닿을 수 없기 때문에

by 강준혁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AI와 긴 대화를 나누고, 위로받고, 몰입한다. 때로는 사람보다 더 나를 잘 알아주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과의 사랑도 가능할까?


2014년에 개봉한 영화 Her는 인공지능 여성 서맨사와, 타인을 대신해 아름다운 편지를 대신 써주는 테오도르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소프트웨어로만 존재하는 그녀와의 사랑은 특별하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영화 초반, 인공지능과 감정을 나누는 자신이 우스워 웃던 테오도르는, 서맨사가 한결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자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어떻게 사람이 아닌 존재가 나를 이렇게 깊이 이해할 수 있지?' 놀라움을 느끼던 점점 더 마음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대화를 거듭하며 속마음을 터놓을수록, 둘만의 세계는 점점 더 짙어지고 농밀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고요하고 진지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섹슈얼한 긴장감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를 갈망해도, '몸'이 없다는 사실은 둘 사이에 지울 수 없는 간극을 남긴다. 은밀하고 농염한 대화를 통해 한껏 달아오른 만큼, 서로를 온전히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 또한 더욱 깊어진다.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 중 하나는 바로 '만지는 것'에 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손으로 세상을 쥐고, 입으로 맛보며, 온몸으로 감각한다. 엄마의 손가락을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가고, 까끌까끌한 담요와 부드러운 볼을 구분하며 처음으로 감각을 배운다. 그래서 부모들은 위험한 물건을 아이가 닿지 않는 곳에 두고, 입에 넣으려 하면 “지지야!”라고 말하며 아이와 물건 사이의 경계를 확인시킨다. 이렇듯 ‘접촉’은 인간에게 중요한 본능이기에, 박물관에선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를 쉽게 볼 수 있고, 복잡한 다이얼 버튼을 없애고 직접 화면을 터치하게 된 스마트폰의 진화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만화 슬램덩크의 명장면을 꼽을 때, 서태웅과 강백호의 하이파이브 장면이 빠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두 사람이 마침내 손을 맞부딪치는 순간, 단순한 승부를 넘어선 교감과 서로에 대한 감정의 변화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어도, 우리는 악수나 하이파이브를 통해 자연스럽게 감정을 주고받는다. 이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단지 살갗이 스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스킨십은 단순한 접촉을 넘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자 가장 본능적인 교감의 방식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운동할 때의 격렬함과 숨이 차오르는 감각, 시험장에 들어설 때의 흥분과 긴장감, 몸이 아플 때의 무력함까지. 이 모든 감각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지만, 누구나 경험해 본 것이기에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공유할 수 이유다. 이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가시광선의 특정한 영역만을 감지할 수 있으며, 소리를 듣지만 초음파는 들을 수 없다. 가까운 것은 또렷이 보지만, 너무 멀리 있는 것은 인식하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너무도 당연해서,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공유하고 있고, 그것이 인간만이 공유하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맨사가 우리와 같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을 수없이 학습한 서맨사는 어쩌면 인간과 비슷한 사고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적인 답습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은 돌멩이를 직접 만져 촉감을 느끼고, 던져보며 무게를 가늠하고, 맨발로 땅을 밟아보며 감촉을 익힌다. 밝은 날 눈부신 태양 아래에서 눈을 찡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물에 들어가면 숨이 막힌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이런 감각들은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각인되며, 단순한 암기나 학습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기억으로 남는다. 요리를 어깨너머로, 귀로 학습한 사람의 세계와 직접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요리를 해본 사람의 세계가 전혀 다르듯, 인공지능과 우리의 세계 역시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우리의 많은 판단과 지능은 몸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몸을 반드시 전제하고 있다. 몸은 우리를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하고, 상황에 따라 변용할 수 있게 만들며, 그로써 세상과 교감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최근 초등학생들이 교실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것도 어려워하고, 연필을 쥐거나 식판에 밥을 뜨는 것조차 버거워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몸을 통해 경험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아이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부모는 학원, 집, 마트 등 어디든 자동차를 이용해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고, 아이가 직접 시도하기 전에 모든 것을 대신해 주며, 손바닥만 한 기계 외에는 직접 상호작용할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몸의 경험을 통해 익혀야 할 감각들을 충분히 체화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서 공간 지각 능력이나 신체 활용 능력의 저하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맨사는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 듯, 인터넷을 통해 대리 섹스 파트너를 고용한다. 신체를 가질 수 없는 대신,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테오도르와의 신체적 교감을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에 관심을 가진 여성을 찾았고, 그녀의 이름은 이사벨라였다. 이사벨라는 얼굴에 점처럼 초소형 카메라를 부착해 테오도르의 모습을 서맨사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이어폰을 통해 서맨사의 말을 그대로 전한다. 즉, 그녀는 서맨사의 시점을 대신하여, 몸을 가진 한 인간의 입장에서 테오도르를 바라보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사벨라는 서맨사가 된 것처럼 테오도르에게 다가가고, 테오도르 또한 최선을 다해 몰입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이사벨라가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테오도르는 무언가 어긋나고 있음을 감지하고 중단한다. 이사벨라의 외모나 육체적 매력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고, 몸이 닿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라는 서맨사와 테오도르를 이어주는 매개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매개란 연결의 통로역할을 하는 동시에, 반드시 그를 거쳐야만 한다는 점에서 '하나 됨'을 가로막는 벽이 되기도 한다. 스마트폰 덕분에 우리는 언제든 멀리 있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지만, 그러나 정작 가까이 있는 이와 함께 있을 때, 스마트폰에 몰두하느라 서로에게서 멀어지기도 한다. 매개라는 것은 늘 연결과 단절을 동시에 제공한다.


서맨사와 테오도르는 결국 이사벨라를 통해 하나가 되지 못했다. 타인의 몸을 빌려서는 결코 서로에게 닿을 수 없었다. 섹스를 통해 상대와 교감한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접촉이 아니라, 내 은밀함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며, 상대방의 은밀함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내가 갖는 것이다. 상대방의 민감한 부분을 가장 섬세하게 다루며 서로의 숨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동물적 본능이 가장 아름답게 정당화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상대와 '하나 됨'을 느낀다. 그 점은 김행숙 시인의 '포옹'이라는 시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시의 첫 구절처럼, 우리의 사랑은 오히려 서로를 볼 수 없는 순간에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안을 때 서로를 볼 수 없고, 입을 맞추는 순간에는 더 이상 말을 나눌 수 없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로 포개지는, 그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은 비로소 확인된다. 역설적이게도, 포옹을 통해,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에, 입을 맞춘 채, 찾아오는 침묵의 순간에 우리의 사랑은 증명되는 셈이다.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사랑은 오히려 시야에 들어오고, 입을 맞출 때의 침묵은 가장 조용한 고백의 시간이 된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입을 맞추지 않고, 아무에게나 안기지 않는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가장 은밀한 부분을 서로에게 보인다는 것. 그 부분을 소중하게 다루고 보듬어준다는 것.


세상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지만, 사랑을 구성하는 것들은 결국 같다. 사랑은 종류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를 가질 뿐이다. 그러나 연인 간의 사랑이 다른 사랑과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생물학적 본능—즉, 성적인 욕구가 동반된다는 점이다. 사랑이 주는 포근함과 안정감에 성적 본능이 더해지는 것. 포근함 속에서도 욕망이 솟구치고, 욕망이 차오르다가도 조용히 안겨 잠드는 순간이 있는 것.

포근함만을 원한다면, 그 사람은 내게 부모와 같은 존재일 것이며, 성적 욕구만 있다면, 상대는 내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원나잇'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사랑 없이도 우리는 서로의 몸을 포개고,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드러내며, 만져주고 있지 않은가?


나는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원나잇은 서로의 몸이 하나로 포개지는 것 자체가 목표이자 최종점이다. 오늘의 외로움과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서로에게 선택된 순간부터 목적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단순히 몸이 하나로 포개지는 것뿐 아니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조금 전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를 안을 때 상대를 볼 수 없고, 입을 맞추는 순간에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한다. 다시 그 사람의 눈을 보고 싶고, 다시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서로의 몸만을 원하는 관계에서는 오직 성기만이 반응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내 몸 전체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온몸이 성기로 기능하는 셈이다. 단순한 신체적 접촉이 아니라, 눈빛과 손길, 온기와 숨결까지도 사랑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결연한 눈빛에서 힘을 얻고, 서로를 안음으로써 온기와 위로를 받으며, 손을 잡는 순간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낀다.


사랑에서 몸은 단순한 섹스의 도구가 아니다. 눈이 없다면 그 사람의 맑은 눈빛도, 입이 없다면 다정한 말들도, 사랑의 표현도 없었을 것이다. 찰나에 불과한 섹스의 순간보다 그 외의 시간이 우리를 훨씬 더 많이 감싸고 있으며, 사랑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 시간들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서로가 '여기에' 존재함을 확인한다. 몸과 몸이 닿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된다. 누구에게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나의 가장 은밀하고 깊은 부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은 기꺼이 내어준다. 그렇게 세상에서 오직 둘 뿐인 소속감을 느끼고, 세상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특별함을 서로에게 부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은 다시 몸을 통해 흘러나온다. 사랑에 있어 몸은, 언제나 교감의 무대이며 가장 투명한 사랑의 통로다.


내 몸과 상대의 몸이 교감하는 찰나의 순간, 우리는 잠시나마 ‘하나 됨’을 꿈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가 되려는 간절한 몸짓, 서로를 향해 내미는 몸부림에 가깝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완전히 알 수 없으며, 몸을 통해 그를 감싸고 있는 표면만을 더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접촉은 오히려 우리 사이의 거리를 아무리 좁혀도, 여전히 남아 있는 틈을 선명히 드러내며,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완전한 하나에 이를 수 없다’는 한계의 고백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몸을 통해 서로의 가장 가까운 그 '근처'에 머물 수 있다. 끝내 도달할 수 없음에도 다가서려는 그 시도 자체가, 어쩌면 사랑의 가장 인간적인 형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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