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까?
영화를 보고는 있지만 정작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어도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다른 생각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단순히 망막에 맺히는 빛의 자극에 불과하고, 앞사람의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퍼지는 파동에 불과할 뿐이다.
에드문트 후설은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우리의 의식이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의 인식은 단순히 감각을 통해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가 의미 있는 경험으로 구성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대상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관계 속에서 엮여 있으며, 그 관계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대상은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관계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 의식이 대상을 향해야만 한다. 우리가 딴생각에 잠긴 순간, 눈앞의 장면은 단순한 물리적 자극에 머물지만, 의식이 그것을 향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경험으로써 내게 다가온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늘 가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평소처럼 마주 앉은 식탁엔 음식이 놓여있다. 조엘의 시선은 주변을 향한다. 옆 테이블의 커플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한다.'우리도 그런 커플이 된 건가? 식당에서 보면 딱해 보이는 커플? 그 시체 같은 커플이?' 그 순간,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눈앞에 있지만 그의 의식은 그녀를 향하지 않고 있다. 마치 힘껏 던졌지만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떨어지는 공처럼, 서로는 서로를 향하지만 닿지 못한다. 그녀의 모습은 분명 내 눈에 맺히고 있지만, 더 이상 클레멘타인은 의미를 지닌 존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조엘은 그 순간, 관계가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음을 자각한다. 마치 매일 반복하는 업무처럼, 기계적인 동작으로 관계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관계가 앞으로 전혀 나아가지 않고 있다. 마치 같은 노래의 한 구절이 무한히 반복되는 듯한 정체감과 권태로움만이 조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조엘은 이 불쾌한 감정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 손을 뻗어 클레멘타인의 머리를 정리해 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도 일말의 온기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후설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단순히 외형적인 감각 정보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숨 쉬고 있으며,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것이고, 걸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옆모습만 보고 있을 때조차도 보이지 않는 반대쪽 얼굴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다. 이는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지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의식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우리의 의식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 안에 쌓인 것들이 대상을 향해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후설은 이를 ‘자연적 태도’라고 불렀다. 즉, 우리는 대상을 단순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숙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경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는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그들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서로의 마음이 변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분명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그것은 '소리'에 머물 뿐이다. 서로의 말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고, 공기 중에 부유하는 소음처럼 흩어진다. 의식이 서로를 향하지 않는다면, 서로의 존재는 그저 감각적인 정보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지금 서로를 보고, 서로의 말을 듣고 있지만, 그것들은 의미로써 맺히지 않는다. 이는 가슴을 울리는 노래가 아니라, 내 귀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배경 음악과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게 서로는 자신들이 더 이상 의미로 연결되지 않고 있음을, 관계가 익숙함 속에서 무뎌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조엘이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의식한 순간, 조엘의 의식 속에서 클레멘타인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게 되는 신호이기도 하다.
내 삶의 전면에 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배경으로 물러나는 느낌. 아마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의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충분했다. 설레고, 아무 걱정 없이, 눈앞의 것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하루는 그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의 하루는 월급을 받기 위해 보내는 서른 개의 날 중 하나일 뿐이거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바쳐야 하는 땔감처럼 여겨진다.
소중했던 하루들은 이제 후회에 묶인 과거와 불안으로 가득한 미래 사이에서 애매하게 떠다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느새 '오늘'은 과거를 반성하며 더 나은 하루를 살아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고, 내일을 위해 마땅히 희생되어야 하는 하루로 격하되어 버렸다. 무언의 강박 속에서 하루는 무채색으로 흐르고, 우리는 그 하루를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그런데 가끔, 너무 좋은 노래를 만나는 순간, 깊이 빠져드는 영화를 보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 그러니까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오늘'의 위상은 완전히 뒤바뀐다. 그 순간만큼은 과거의 후회에서도, 미래의 불안에서도 자유로워지며, 오롯이 현재를 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몸이 피곤해도,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고 해도, 그 사람 곁에 더 머무르고 싶어 시간을 쏟고, 심지어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니체는 그의 저서『도덕의 계보』에서 망각이 가진 힘에 대해 예찬한 바 있다. "망각은 건강의 한 형식"이라고 주장하며 망각이 없다면, 어떠한 행복도, 명랑함도, 자긍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며 주장을 뒷받침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우리를 온전히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해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로부터의 망각, 미래로부터의 망각. 즉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현재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몰입은 상당히 닮아있다. 내 시야에서 사라져 있던 현재를 선명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망각을 통해 현재에 머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해.’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니까 잘 보여야 해.’ 같은 막연한 기대를 스스로에게 주입하며 억지로 가치를 부여하려 한다. 하지만 가치를 먼저 설정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그렇게 형성된 가치는 의미를 갖기 어렵다. ‘저 사람은 높은 사람이니까 잘해야 해.’ ‘저 사람은 내 이상형에 부합하니까 좋을 거야.’ 같은 기대는 오히려 긴장과 부자연스러움을 만들 뿐, 몰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영화나 게임에 푹 빠져 있을 때, 너무 좋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을 체감한다. 어둑해진 창밖을 바라보며 비로소 시간이 흘러갔음을 깨닫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몰입을 선사한 대상은 가치 있는 것으로 가슴 깊이 각인된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치 있게 여기기에 몰입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깊이 몰입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확인되는 것임을. 이 순간, 그 몰입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것들은 내 의식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이 순간을 방해하는 불청객이 들어올 작은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의 강력한 힘은 바로 그곳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산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죽고 싶은 사람에게 산소는 없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산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산소가 지닌 의미, 그 산소의 쓸모가 아니던가.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습관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숨의 의미와 쓸모를 온몸으로 느낄 때, ‘살아 있다’는 말은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렇듯 사랑은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아주 단순한 결론에 이른다. 사랑은 곧, 지금 이 순간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은, 상대가 나를 거창한 계획의 일부로 여겨주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이 순간을 온전히 행복으로 느끼기를 바라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느끼는 행복이 나에게도 느껴지는 것.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순간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우리를 미래로 데려다 놓는 것. 지금 이 순간들이 우리를 지속시켜 주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사랑은 영원의 약속이 아닌, '지금'의 연속이어야만 한다.
배경으로 밀려나 있던 오늘을 다시 '소중한 현재'로 되돌려놓는 것. 내 시야에서 사라진 것만 같았던 현재를 다시금 구원해 내는 힘. 그것이야말로 사랑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