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비효율을 자처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안기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안아주고 싶어 하는 두 사람'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댓글이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 대한 짧은 문장이었지만, 내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사랑과도 많이 닮아있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이상형이나 바라는 이성상을 이야기할 때, 자신이 가진 결핍을 채워 줄 누군가가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 연락이 끊기면 안 되고, 게임은 일주일에 몇 시간만 해야 하며, 애정 표현이 많아야 하고… 이런 조건들을 정해두고 마치 그에 맞는 상대를 찾는 것이 사랑이라는 듯 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아침 일찍 도시락을 준비하는 부모의 마음, 짜장면을 싫다고 말하던 한 노래 가사속 어머니의 마음은 무엇일까. 아침 일찍부터 도시락을 싸는 일이 그저 즐거워서는 아닐 것이며, 어머니가 짜장면을 싫다고 하셨던 이유 역시 짬뽕이나 볶음밥을 더 좋아해서가 아닐 것이다.
내 아이가 배고프거나 친구들의 도시락을 부러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보다, 새벽의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이 더 나을 테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을 아이를 떠올리면 힘이 나기 때문이다. 내가 짜장면을 먹지 못하는 아쉬움보다, 내 아이의 배를 채워 줄 수 있다는 안도감과 행복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내 결핍을 채우거나, 무언가를 보상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보상을 계산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스스로 무언가를 주고 있다. 그 사람에게 베푸는 일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니, '아깝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나도 모르게 어떤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시간과 돈을 쓰고 있는지 지켜보라는 말이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시간과 돈은 그저 마음을 표현하는 실체이자 수단일 뿐이다. 방점은 시간과 돈이 아니라 마음에 찍혀야 하는 이유다.
연인이 손 편지를 좋아한다면, 글솜씨가 없어도 정성껏 편지를 써볼 것이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요리가 있다면 서툴지만 한 번쯤 도전해 볼 수도 있다. 함께 여행하고 싶어 운전면허를 따고,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다이어트나 악기 연습을 하기도 한다. 더 깊이 있는 대화를 위해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애쓴다. 그 기쁨이 어느새 나의 기쁨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이타심의 기저에는 언제나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 단순히 그 사람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단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며, 보상을 받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아픈 연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밤새 간호하고, 직접 준비한 죽을 먹이는 것은 대가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걱정되기에, 곁에 있고 싶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연인이 다음 날 ‘고생했어’라며 몇 장의 지폐를 내민다면? 우리는 그 순간, 모멸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내 마음에 대한 보상이 돈이 되는 순간, 사랑의 행위는 거래로 변질되고 만다. 가게에서 물건을 돈과 바꾸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물질적인 형태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네가 곁에 있어줘서 마음이 놓였어.'라는 말 한마디가 그 어떤 보상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경제학-철학 수고』에 써두었던 것 아닐까?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교환될 수 있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는 더 큰 사랑으로 답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사랑은 비효율을 자처하는 두 사람 사이에 효율적으로 쌓여가는 '무엇'이다. 우리는 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내가 가진 무언가를 상대에게 끝없이 흘려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하루 종일 하늘에 떠 있는 해가 자신이 빛을 주고 있다는 걸 잊은 채 저물어가듯이.
사랑은 무소유(無所有)와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게 사랑은 무소유라기보다는 비소유(非所有)라는 표현이 가진 미묘한 뉘앙스가 더 가슴깊이 다가온다. 그 속에 조용히 스며있는 가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게 아니라, 사랑을 통해 점차 아무것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는 마음이 쌓여,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않게 되는 것. 그렇게 쥐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역설. 그것이 사랑의 방식인 셈이다. 그렇게 비워짐으로써 오히려 가득 채워지는 것. 사랑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한다. 가장 경이로운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