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꼼수보다는 어설픈 정공법으로.

그대는 나의 온몸으로 부딪쳐 느끼는 사랑일 뿐야

by 강준혁

사랑은 우리를 가장 나답게 만들기도, 가장 낯설게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고 싶지만 멀어질까 두렵고. 표현하고 싶지만 외면받을까 망설여진다. 사랑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면서도, 동시에 머뭇거리게 만든다.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왠지 작아지고, 어색해지고,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어느새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그 사람의 SNS를 들락거리며 그 사람의 취향을 파악하고 그의 흔적을 더듬는다. 마치 탐정이 된 것처럼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 가끔 공유하는 가사, 웃으며 찍힌 사진 속 배경부터 혈액형, MBTI, 별자리 궁합까지 검색하며 더 나은 나를 보여주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이어진다. 내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사람 앞에서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못 한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한 수천 개의 대화는 정작 현실에서는 단 한마디도 쓰이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진다.


우리는 본래 자신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세계와 타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주관(主觀)’은 ‘주인(主)’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하고, ‘객관(客觀)’은 ‘손님(客)’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세계의 중심이 이동한다. 이제 세상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된다. 나는 그의 시선 속에서 나를 찾고, 그의 말 한마디에 휘청이며, 표정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그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려 애쓰게 된다. 사랑은 우리를 새로운 기호학 속으로 밀어 넣는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손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주인의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운동과 요리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 속에서 나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나는 운동을 잘하나? 무거운 가구 정도는 잘 드니까 그거라도 어필해 볼까? 요리는 잘 먹기만 하는데 어떡하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주인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시선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조정한다.


동시에 우리는 나만의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그의 취향과 성향을 나름의 논리로 추론하고 분석하며,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 사람이 말하는 걸 미루어 볼 때, 아마 귀여운 남자를 좋아할 거야.’


그렇게 나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사들이고, 내 안면근육을 최대한 활용해 귀여움을 담은 셀카를 SNS에 게시한다. 하지만 정작 그가 좋아하는 건 운동을 잘하는 터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난데없이 귀여운 척을 하는 내 모습이 피드에 추가됐을 뿐이다. 내 귀여움의 철학이 가득 담긴 '두 손으로 꽃받침 하기 포즈' 사진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를 안내했다.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는다. 나를 객관화하고, 상대를 절대화하며, 그 속에서 우리는 헤매고 또 헤맨다.



이 모든 건, 그 사람에게 더 멋진 나로 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나는 그 사람의 시선 속에 나를 투영하고, 그 주관적 시선 속에서 길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사랑이란 언제나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우리는 언제 틀릴 수 있고, 무너질 수 있다.


내가 강구해 내는 방법들이 모두 불확실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걸까?

어느 시인은 말했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 앞에서 누가 방법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데. 또 정형화된 방식으로는 결코 누군가의 마음 깊숙이 닿을 수 없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이 무의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여자가 꽃과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반기는 것도 아니다. 설령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 순간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 정해진 공식을 대입하듯 연애 기술을 익히고, 무언가를 외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그 사람만의 리듬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 변화무쌍한 리듬 속에서 함께 호흡하려 노력하는 것, 사랑이라는 건 그 감각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 아닐까?




'그대는 나의 온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사랑일 뿐야'


한 노래 가사처럼, 결국 사랑에는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는 거라면, 그 방법 없음에 직면하는 수밖에.

이것저것 따지고 머리를 굴려 계산하기보다는, 그냥 그 사람에게 온몸으로 부딪혀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방식 아닐까?


우리는 종종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자신을 숨긴다. 자존심과 방어기제 때문에 허세를 부리고, 더 강한 척, 더 세련된 척한다. 하지만 때로는 가장 투박한 순간이 가장 진실한 순간이기도 하다.

연인의 삐뚤빼뚤한 손 편지, 불안한 음정으로 조심스레 불러주는 노래, 경직된 발로 박자를 맞추며 연습한 춤. 혹은 가사의 뜻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아이들이 순수한 눈으로 노래할 때. 어설프고, 서툴고, 완벽과는 거리가 먼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깊은 울림을 주는 건, 그 마음의 출처를 알기 때문이다. 그 어떤 기술도, 꼼수도 부릴 줄 모르는 태도. 그 솔직함에서 묻어 나오는 투박함이야말로 사랑을 가장 사랑답게 만든다. 주체 없는 미사여구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데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요. 그래도 그쪽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저도 알아가고 좋아해 보고 싶어요.'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불완전한 정공법이 유려한 꼼수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다.

어떤 결단을 내릴 때, 우리를 결단으로 이끄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용기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다치는 게 무서워 내 안으로 도망친다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잃을 각오 없이는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그 모든 대가를 기꺼이 끌어안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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