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머무름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의 가장 비극적인 진실 중 하나는,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유롭다는 사실이 어째서 잔인한 진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 사람은 온전한 하나의 주체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며, 그 자유 속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자유마저 포함되어 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을 나는 막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내게는 너무나 큰 비극으로 다가온다. 사랑이란 언제나 자발적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타의에 의해 결론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한동안 멜로 영화에 푹 빠져 살던 때가 있었다. 여느 때처럼 영화를 보던 중, 한 작품이 내게 큰 울림을 남겼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라는 일본 영화였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면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거나, 화면을 멈춰놓은 채 그 장면 속에 머무르는 습관이 있다. 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한 장면에서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화면을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여자 주인공 시즈루는 남자 주인공 마코토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마코토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과에 다니는 미유키였다.
마코토가 미유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즈루는 조용히 미유키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그 모습을 발견한 마코토는 당황하며 서둘러 달려간다. 그리고 시즈루에게 뭐하는
거냐며 따지듯 묻는다. 그러자 시즈루는 대답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나도 좋아해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 장면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나 아닌 다른 존재가 그 행복을 가져다줄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그 말을 듣는 순간, 강렬한 충격이 나를 동요시켰다. 사랑이라 불려도 마땅한 것들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내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사람이 행복해지는 일이라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건 그저 과한 소유욕 아니었을까?
사랑은 언제나 모순적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행복을 바란다. 하지만 내가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의 행복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더라도 기꺼이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것을 온전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그의 자유를 저주하거나 내 자신이 불협화음이 되어 그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사랑을 사랑으로 되돌려 받지 못하는 건 참 슬픈 일이지만, 사랑이란 결국, 그 사람의 자유를 사랑하는 일과 같은 거니까.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 폭력적인 방법으로 지하실에 가두고, 며칠간 아무것도 먹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그녀 앞에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놓고, "너 나 사랑해? 안 사랑해?"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그녀는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며 소리칠 수도 있고, 살기 위해 사랑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해"라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랑 고백에 아무런 의미도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Yes'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냉소적 이성비판> 슬로터 다이크
슬로터 다이크는 말한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Yes'만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지하실에 갇힌 그녀의 대답이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내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지를 힘으로써 박탈시켰기 때문이다. 'Yes'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Yes'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납치와 스토킹이 폭력적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나의 욕망을 위해 상대의 자유를 제거하는 이 행위는, 인간의 존엄을 가장 극단적으로 훼손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상대는 그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단순히 극단적 예시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서도 No라는 선택지가 제거되는 경우는 빈번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직급의 직장 상사가 ‘난 짜장면 먹을 테니 자네들은 편하게 선택하게’라고 말하면, 직원들은 눈치만 살피다 결국 짜장면을 시킨다. '나는 남아서 일할 테니, 퇴근하고 싶으면 먼저 가도 돼'는 말에 누구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자유만큼이나, 상대의 자유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 상대는 'Yes'와 'No' 두 개의 카드를 모두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선택지가 강요되는 순간, 그 대답은 단지 소리의 형태만 가질 뿐,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친구들과 놀 때 너무 행복해하는 내 아이가 어느 날 문득 “오늘은 엄마, 아빠랑 놀고 싶어.”라고 말해주기 때문에,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 주말의 온전한 쉼을 포기하고 기꺼이 나를 만나러 와주는 친구가 있기 때문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 그 사람이 내 곁에 머물러 주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사랑해’라는 말을 내 눈을 마주치며 건네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감사할 수 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내게 ‘Yes’라고 대답해 주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아름답게 채색되는 것이다.
사르트르 역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서 자유로이 선택되어야만 한다'라고.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과 동의어라고.
그래서 나는 ‘알아보다’라는 말이 주는 느낌을 특히 좋아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서 희소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이기 때문에, ‘알아봄’이란 말은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진정한 선택의 순간을 뜻한다. 그러니 지금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희소성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적어도 누군가는 나의 고유함을 알아봐 준 거니까.
상대가 자유롭다는 사실은 때로 비극으로 다가오지만, 그 자유 속에서 나를 선택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희극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자유마저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