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네 이름을 다 부르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부르고, 또 그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불리고 있을까.
그 사람에게는 무언가 특별하게 불리우고 싶다. 아니, 그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특별해진다. 우리는 어떤 존재를 이해하고 구분하기 위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 아래 어떤 특성을 덧붙인다.
철학에서는 이를 ‘외연'과 '내포’라고 부른다.
외연이란, 어떤 개념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대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동물’이라는 개념의 외연에는 고양이, 강아지, 새 같은 실제 존재들이 포함된다. 반면 내포는 그 개념이 갖는 속성들이다. ‘살아 있다’, ‘움직인다’, ‘감각을 가진다’ 같은 것을 말한다. 내포는 그 개념을 그것이게끔 만드는 핵심적인 특성들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사랑하는 그 사람”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오직 그 사람이다.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 말 그대로 ‘Only One’인 셈이다. ‘동물’이라는 개념 안에 고양이나 강아지가 외연으로 포함되는 것과 달리, 그 사람의 이름은 오직 그 사람만을 가리킨다.
그 이름은, 단 하나의 존재와 일대일로 대응되는 고유한 이름이다. 비록 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세상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부르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그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며, 다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로 대체한다고 해도 그 빈자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던 고유한 외연이 사라졌다는 뜻이고, 그 이름 아래 조용히 쌓여 있던 수많은 내포들, 즉 목소리, 눈빛, 습관, 하루의 결, 침묵마저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라진 건 이름이 아니라, 이름이 부여했던 하나의 ‘세계’다. 그 이름으로만 열 수 있었던 세계가, 문이 닫힌 채로 사라진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또 낳으면 되지”라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또 다른 아이를 낳는다 해도, 세상을 떠난 그 아이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 자리는 오직 그 아이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불리우는 내 이름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리우는 내 이름은 같은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사랑하는 사람이 날 부를 때와 직장상사가 나를 부를 때의 느낌은 그렇게 다른 걸까?
들뢰즈는 일반성과 특수성을 한 쌍으로 묶고, 그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편성과 단독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말은 일반성을 지닌다. 그리고 나, '강준혁'은 그 일반성 안에 포함된 하나의 특수한 개체일 것이다. 공사장에서 일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작업반장은 아마 “어이, 거기 남자 한 명만 와봐!” 하고 외칠 것이다. 이때의 ‘남자’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그냥 일손이 필요한 범주로서의 호명이 된다. 만약 그가 “강준혁! 이리 와봐”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에겐 ‘강준혁’이라는 이름조차, 단지 쓸 만한 한 사람을 가리키는 도구일 뿐이다.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을 만큼, 나는 그저 '대체 가능한’ 존재일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의 ‘강준혁’은 특수한 존재일 수는 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존재는 아니다. Particularity, 즉 특수성이란 언제든 교환 가능하고, 대체 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마치 커피를 쏟으면 새로 타면 그만인 것처럼.
하지만 앞서 설명한 한 쌍(일반성과 특수성)과는 달리, 보편성과 단독성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말하는 단독성(Singularity)은 더 작은 차원에서 ‘특이점(Singular Point)’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특이점이란, 곧 사건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을 의미한다. 물이 반드시 특정한 지점에서 끓기 시작하는 것처럼, 매일 보던 그 사람이 어느 날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처럼.
사건이란, 언제나 일반적이고 평평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불현듯 발생하는(Singular), 작고도 강렬한 변곡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고, 몸의 세포 하나하나, 살아온 시간, 사고방식까지 모든 것이 각자 다른 특이점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특이점들이 모여 우리를 유일무이한 존재,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하나의 특이성(Singularity)은 수많은 특이점(Singular Points)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특이점들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또 다른 특이점들이 겹겹이 자리하고 있다. 생김새도, 사고방식도, 살아온 배경도 모두 다르기에 우리는 각자 고유하다. 바로 그 다름이 우리를 독특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로소 우리만의 고유한 다름을 ‘단독성(Singularity)’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부를 때, 그 부름은 바로 이 단독성에 의거한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동명이인으로도, 혹은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존재다.
단 하나의 외연에, 무한한 내포를 지닌 유일한 존재. 그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자, 결국 우리들 모두 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하나의 고유명사다. 그리고 사람뿐 아니라, 무엇이든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그 순간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고유명사로 자리 잡는다.
어떤 언어를 통해서도 온전히 환원될 수 없는 것. 그게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이름이다.이름은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순간’, 그 이름은 고유명사로서의 생명과 효력을 갖는다.
“그대가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내가 나인 게 너무 행복하죠.”
서영은의 노래 가사 한 구절이 내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거나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의 행동과 말과 습관과 체취와 표정과 눈빛과 살결을 포함해서, 그 사람과의 기억, 그 사람에게 깃든 의미까지, 그 사람과 맺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의 '이름'을 통해 매듭지어 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긴 사람,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웃는 게 예쁜 사람, 청바지를 입은 사람처럼—그 사람을 이루는 내포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내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최대한 알아가려는 노력만이 그 사람의 근처에 다가가 보려는 노력만이 가능할 것이다. 또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설사 변하지 않는다 해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같은 것을 보고도 각기 다른 해석을 내리는 우리들처럼. 어릴 적 보던 만화영화를 어른이 되어 다시 보면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람을 이루는 것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아니 그 사람은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라고 해야할 것이다. 머리가 길었던 그 사람이 어느 날 삭발을 하더라도, 소설을 좋아하던 그 사람이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게 되더라도, 웃는 게 예뻤던 사람이 깊은 슬픔에 잠겨 미소를 잃게 되더라도—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누군가를 제대로 바라보려 한다는 건,
그 사람의 무한하고도 불연속적인 내포를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시도다.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그 사람만의 내포를 내 눈을 통해 기꺼이 발견해 주려는 의지다. ‘나’라는 고유한 필터를 통해 그 사람을 다시 바라보고,
그 사람의 무언가를 나의 눈을 빌려 발견해 낸다. 그리고 그 해석은 또 하나의 새로운 내포가 된다.
선생님, 배우, 엄마, 아빠, 아내, 남편 같은 명칭들은 그 사람이 맡고 있는 사회적 역할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사람의 국적이나 피부색 역시, 그를 이루는 수많은 것들 중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선생님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엄마가 그러면 안 되지.”등의 말들은 결국 그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의 여지를 하나의 속성에 가두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단 하나의 역할, 정체성, 이미지로 묶어두는 일은 억압이며,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도들은 대부분 나의 불안, 방어기제, 소유욕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나의 불안과 이기심을 상대에게 투영해 그 사람의 변화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나는 그런 권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말, ‘사랑을 위해 참고 견딘다’는 말이 나의 폭력을 미화하는 방식이 되어선 안 된다. 관계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타당하나, 그 노력이 사랑을 가장한 억압이 되어선 안된다.
시간은 반복되고, 반복은 익숙함을 낳는다. 익숙함은 권태를 부르고, 권태는 때때로 사랑을 지치게 만든다.
그 권태를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힘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사람만의 고유함’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그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의 고유함, 그것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가슴 깊은 곳에 소중한 가치로 정립된다. 이렇듯 우리의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바로 ‘대체 불가능함’에 있을 것이다.
사랑은 끝없이 수정되는 호명의 연습이자 그 사람을 부르는 법을 끝없이 배워가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언제나, '아직 네 이름을 다 부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니 그 말 앞에서 멈춰서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