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추억

세월에 바뀐 위치

by 청해

바나나!

내가 스무 살 쯤이었을 때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일반 시장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귀한 과일이었다. 있다 해도 비싸서 사 먹는 건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과일이었다.

그날은 큰 재래시장이었는데, 나무로 만든 사과 상자를 엎어 놓은 그 위에 두어 개 올려 있는 바나나는

색깔이 어느새 흑색이었다.

나는 그 귀한 바나나를 발견하고 먹고 싶다는 생각으로 쭈뼛거리며 서성거렸다. 다가가 가격을 물으니 고

조그만 것이 500원이라고 한다. 그 당시 500원이면 굵은 사과 열 개도 족히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호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헤아려 보았다. 500원을 쓰고 나면 앞으로 몇일이 힘들어질 것을

아는지라 그 앞에서 나의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맛있다는 말만 들은 바나나 맛이 궁금하기도 했고, 정말 그 앞에 서서 고민 아닌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큰맘 먹고 샀다. 그 당시 바나나 500원이면 비싼 건 아니다. 색깔이 변해서 싼 거지 더 비싼 것이다.

한 번 먹어보고 싶어서 몇일 힘들어질 거란 생각도 지워버렸다


가진 돈 거의 다 주고 산 바나나, 크기는 윷가락 정도, 색깔은 흑색, 요즘 같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바나나.

내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면서 혹시 떨어뜨릴까, 부서질까, 조심스레 그 자리에 서서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벗기자마자 드러난 속살은 눈이 부셨다. 온 몸을 자극하는 단내, 한 잎 베어 문 바나나는 향긋하고

달콤한 맛과 스르르 녹아드는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요즈음은 그날 내가 먹은 그 바나나 맛이 안 난다. 처음 맛본 맛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바나나는 세월이 지나면서 나라가 부유해지고 경제적인 여유로 인해 다양한 과일에게 자리를 양보한 지

오래되었다. 시장에 가면 이름 모를 과일들은 바나나가 내 어릴 적 호기심을 자극하듯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비싼 과일의 대명사였던 바나나가 가장 싼 과일이 되어버렸다. 한 다발에 6000원이라니! 그저 놀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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