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토리텔러 엉겅퀴 Jul 24. 2024

부부가 함께 일한다고?!

17화 쌓인 감정과 기억을 치유하기 

신혼부부 임대아파트에서 탈출(?)한 우리는 부천으로 돌아와 다시 처음처럼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살기로 했어. 인천에서 2년 여 살며 가족 구성원도 늘어나고 매장도 늘어나고 직원도 늘어나고 매출도 늘어나고 … 빚을 제외한 모든 게 늘어나 남들이 보기에 행복해 보였지만 부부의 ‘마음의 거리’마저 최고조로 늘어났던 과거를 뒤로 한 채. 



‘정신 나간 여편네’들이 많던 임대아파트 생활에 진절머리가 났던 남편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아파트는 안 산다!”라며 작은 빌라를 매매해. 당시에도 빌라 매매는 ‘투자를 모르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사회적인 통념이 강할 때였어. 특히 친정 쪽 친인척들이 소식을 듣고 아파트를 사야지 왜 빌라냐 하며 훈수를 두었는데, 남편은 ‘돈 줄 것도 아니면서 내 집 사는데 오지랖이야!’라고 응수하지. 집에서 틈틈이 부동산 공부를 했던 나 역시 좀 작더라도 아파트를 매매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남편의 의견을 안 따를 수가 없었어. ‘내가 내 돈 벌어 집 사는데 네가 돈 보탤 거냐? 넌 나랑 사냐 니 친척이랑 사냐? 부동산 이딴 거 모르겠고 아파트가 싫다, 정신 나간 여자들이 하도 많아서.’라고 했거든.



 남편이 하는 말들을 가만히 보면, 대출 없이 현금으로 매매를 한 것 같지? 아냐, 사실은 그 당시에 빌라를 매매하면서 소위 말하는 ‘업 계약서’로 대출을 있는 대로 다 당겨 받았어.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자금이 부족했고, 신용대출이 가능했던 내 앞으로 2천만 원을 더 받아야만 했지. 하지만 남편은 이때에도 ‘1년 안에 다 갚아 줄게!’라고 큰소리쳤고. 



참 반전이지. 이때가 장사 시작한 지 8년이 되어가는 2017년이었어. 종잣돈으로 시작해도 될까 말까 하는 장사를 2009년에 빚으로 시작하여 갚고 빌리고 반복 했잖아. 초보장사꾼 시절을 지나 본격적으로 사업이 자리를 잡고 2년 남짓 신혼부부 아파트에 살며 주거비용을 줄인 듯했지만 수천 만원 이상의 목돈이 없던 우리는 내 집 마련을 위해 1억 원 이상의 융자를 받아야만 했어. 결혼하고 처음 이렇게 큰돈을 빚지는 것이 무서웠던 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 경제력에 있어 장사하는 남편에게 100% 의지하며 살았으니 가타부타 의견을 얹을 수 없었어. ‘월 천만 원씩 버니까 이 정도는 금방 갚을 수 있다’라는 남편의 말을 오롯이 믿어야 했지. 물론 이때까지 나는 남편의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몰랐고, 매출 장부를 체크하지도 않았어. 더구나 고정적인 생활비를 받으며 사는 것도 아니었고. 홈스쿨링을 하며 모아둔 돈, 친정엄마가 찔러 주신 돈들이 있었기에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남편이 알아서 한다는데.’라는 마음이었지.



이때에 남편은 부천 본 매장 이외에 동업으로 운영하던 서울매장을 정리해. 동업하던 사장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 결정적이겠지만 그 사이 남편 역시 장사꾼으로서 많이 성장했기에 정리 수순을 밟았어. 가족을 등한시하면서까지 영업을 열심히 했던 남편은 동업 기간 동안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터득하고 장사에 대한 마인드까지 바뀌게 돼. 그러면서 비록 빚으로 시작했지만 100% 우리 부부의 힘으로 일군 삶의 터전 하나만을 고수하기로 한 거지. 



그런데 이 과정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 사업을 원래대로 분리하고 정리하려면 현금 2천만 원을 동업 관계에 있던 사람에게 토해내야 한다는 거였지. 부천으로 다시 거주지를 옮기면서 신용대출까지 다 당겨 쓴 마당에 무슨 돈이 있겠어. 현금 2천만 원 어디 없냐고 그렇게 들들 볶는 남편 성화에 못 이긴 나는 결국 친정 엄마에게 또 손을 벌려. 

“엄마,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저 시집간 딸이 남편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기죽지 않고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는 선뜻 돈을 내주셨고, 덧붙여서 말씀하시지. 

“이 돈은 갚을 생각 말고 잊어버려라.” 

그 돈을 넙죽 받은 우리 부부는 제2의 장사를 시작해. 나는 다시 장사꾼의 아내로서 여러 잡일을 하며,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며 N잡러로 지내고 남편은 새롭게 바뀐 비즈니스 모델을 적용해 가게를 운영하고 말이야. (나는 아직 이 돈을 기억하며 사는데, 남편은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장사꾼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게. 협업 관계를 정리하면서 새로운 직원들이 필요했던 남편은 채용공고를 내고 면접을 보고 기본적인 업무에 대한 교육, 온라인 마케팅 교육 등 을 해야 하는 문제에 당면하게 돼. 이걸 남편이 혼자 다 했을까? 아냐. 면접 후 최종 선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사꾼의 아내로 사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됐지. 남편은 매장에 찾아오는 손님 응대와 제품 AS 및 설치, 판매, 재고관리 등만 해도 바빴거든. 




하지만 우리는 초보장사꾼 시절 때보다 더 많이 다투며 지내게 돼. 왜냐하면 둘 다 더 이상 초보가 아니었기에. 이것이 첫 번째 이유야.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 대로, 겪은 것이 있고 배운 것이 있어서 서로의 의견을 내세웠기에 의견 대립이 잦았지. 논쟁 초반 까지는 괜찮아, 매출을 더 높이기 위한 의견이라는 걸 서로 인식하고 있는 터라. 하지만 논쟁의 마무리가 매번 잘 됐을까? 여기서 두 번째 이유가 나와. 장사 관련 논쟁을 하다 가도 지내 온 세월 동안 감정 은행에 쌓아 둔 것이 건드려지면 둘 다 아주 날카롭게 변했거든. 




특히나 내 입장에서는 남편이 음주운전을 비롯해, 수많은 안마 시술소를 다니며 돈을 쓰고 다닌 것, 예쁜 언니들과 놀아난 것, 매장을 2개 운영하며 1년 가까이 대리운전 및 택시비가 월 100만 원이 넘게 나온 것, 매일 마셔대는 술로 인한 숙취를 못 이기고 쉬는 일요일 마저 아이들을 귀찮아하며 지낸 것 등등을 감정이 건드려진다 하면 터뜨렸어. 




남편 입장에서는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신이 그렇게 했기에 우리가 먹고 산다라는 것, 잘잘못을 따지는 나 역시도 자신과 똑같은 인성이라는 것, 일하다 보면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는 거라 세상이 다 비난을 해도 같은 편이어야 하는데 너는 그런 근본이 되지 않는 여자인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분석 잘하고 똑똑해 봤자 어차피 너는 나만큼 못 버니까 닥치고 살아야 한다는 것, 등을 강조했지.




흔히 그런 얘기들을 하잖아, 부부는 함께 장사하지 말라고. 왜 그런 말을 할까? 이런 부분이 이유였을까? 장사를 처음 할 때에는 서투르고 결과가 좋지 않아도 술 한잔에 털어버리고 의기투합하며 지낼 수 있지만 사생활을 공유하는 부부라서 세월이 흐를수록 감정과 기억이 쌓이기 때문인 거겠지. 함께 장사하는 부부는 각자 직업을 가진 부부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기 때문에 더 많이 다투며 살아. 더 자주 얼굴을 보고 더 자주 목소리를 듣고 더 자주 몸짓을 보게 되니 더 빠른 기간 내에 배우자를 파악하게 되고 더 빠른 기간 내에 안 좋은 감정이 쌓이고 더 빠른 기간 내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돼.




그렇다고 장사를 때려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야. 먹고살아야 하니까. 더구나 아까 얘기한 대로 주택을 매매하면서 1억 원 이상의 융자를 받았다고 했잖아. 더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진 우리는 그만큼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야 했는데, 남편은 여전히 “어차피 돈은 내가 다 벌어.”였고, 나는 “나 정도 되니까 이만큼 도와주는 건데 오히려 감사할 사람은 너야.”의 태도로 살며 치열하게 삶을 이어 가. 나 역시 논리와 근거를 들이밀며 따박따박 따지는 삶을 살고.




‘부부는 함께 장사하지 말라’라는 사회적인 통념을 직접 경험해 보고 온몸으로 느낀 지난 세월이야. 함께 장사하는 부부는 특히나 더 바람 잘 날 없고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삶의 고비가 더 자주 찾아오기에 이런 말이 생겨난 게 아닐까 해.


                     

이전 16화 더 이상 장사꾼의 아내로 살지 않겠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