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내면의 분노를 표출하다
"바꿔보자.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내면의 분노 표출 구간)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장사꾼의 아내로 살림만 하며 사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10년 가까이 장사하면서 살림만 하며 산 적이 있나? 장사꾼의 아내면 뭐, 매 순간 무한 감동에 젖어 남편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아야 하나? 떠받들 수 있지. 존경할 만한 인성으로 가족들을 대하고 인생을 발전적으로 사는 사람이면! 아니면 차라리 말도 못 할 액수의 돈을 벌던가. 월 천 버는 능력자 남편? 그것보다 훨씬 더 벌어도 인생을 겸손하게 살고 가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사업하는 남편의 어디까지 참아야 한단 말 인가. 2009년부터 지금까지 (당시였던 2017년까지) 돈 많이 벌어오라 바가지 긁은 적 없고 호강시켜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사업하면서 기죽을까 봐 매출이 떨어져도 입도 뻥긋 안 했는데, 근래 몇 개월 천만 원씩 번다며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빚 청산 다 못했는데 꼴 같지 않은 사장님 놀이나 하며 뻑 하면 집에 안 들어오고, 사업 한지 7년인데 여전히 세금도 제대로 모르고, 혼자 버는 돈이니 혼자 그렇게 쓰며 살아도 되냐고! 돈을 개 같이 벌고 정승같이 쓰라는 옛말도 있는데, 돈을 개 같이 벌어서 개 같이 쓰냐!
왕비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남편을 왕처럼 대하라고? 나는 왕비가 되고 싶어 결혼한 적 없어! 됐고, 난 이제 두 아이의 엄마야, 엄마로서만 내 인생을 살 거야.
이렇게 피눈물 쏟는 다짐을 하고서 나는, 남편이 주는 생활비 없이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과거에 공부해 둔 공예자격증을 활용하기로 하지. 아동 및 성인 대상 공예 커리큘럼을 만들어 공방을 차리려 했는데 현실은 불가능했어. 모든 경제권이 남편에게 있었고 상가 보증금만큼의 월세도 없었거든. 그래서 고민 끝에 당시 흔하지 않았던 홈스쿨링 공방을 진행하게 돼. 음 … 이건 남편이 거의 집에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했던 것인데 … 이런 부분도 장사꾼남편에게 감사해야 하나?
어쨌든, 홈스쿨링이기 때문에 ‘엄마 껌딱지’였던 남매를 무리하게 보육기관에 보내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었어. 더구나 신도시 형성 초기의 신혼부부 아파트인지라 인프라가 워낙 없었던 탓에 공방의 커리큘럼은 매우 인기가 높았어. 남편이 집에 잘 오지 않던 이유에서 홈스쿨링을 한 건 씁쓸하지만 그로 인해 이웃들과 자주 만나고 음식을 나누고 했던 것이 꽤나 누적되었던 터라 이웃들 사이에 내 신뢰도는 엄청났어. 인근 아파트 단지까지 소문이 퍼져서 클래스 문의가 들어오고 말이야.
당시 3살, 1살의 남매를 독박 육아하며 홈스쿨링을 꾸려 돈도 벌고 커리어도 쌓는 1인 다(多) 역(役)의 삶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은 7-8년을 장사꾼의 아내로 살며 결코 살림만 할 수 없었던 고난의 과거를 겪었기 때문일 거야. 그땐 ‘N잡러’라는 표현이 아예 있지도 않던 시기야. 2009년 남편과 장사를 시작해 결코 인정받지 못한 뒷바라지를 하며 7-8년을 N잡러로 살던 나는, 홈스쿨링 공방을 진행하며 장사꾼의 아내 역할은 지워버리고 진정한 프로N잡러로 살았어. 육아와 살림은 물론이고, 오전에는 자기 관리를 한다며 운동을 하고 이른 점심부터 수업준비를 해서 오후 6시까지 수업을 했어. 수업 중간마다 차량 기사 일까지 하며 학생들을 픽업했고 거기서 더 시간을 쪼개 간식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지. 픽업서비스에 수제 간식까지 제공하니 홈스쿨링의 인기는 정말 좋았겠지?
남편과 사이가 멀어질수록 이웃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누적했던 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어. 결국 여자들은 ‘공감(共感)’이거든. 공감을 베이스로 한 소통으로 마음을 알아주면 그 어떤 냉혈한의 여자라도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어. 때문에 몸과 마음의 문을 활짝 개방하고, 지갑 역시 쉽게 열지.(이걸 잘 아는 남자들은 연애가 세상 쉽겠지?) 따라서 미취학 아동들을 둘셋 키우는 여자들 입장에서 내가 기획한 홈스쿨링은 소위 ‘대박’이었어. 철저한 공감으로 신뢰를 쌓은 기간이 있기에 그들의 주머니에서 내 주머니로 돈이 흘러 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쉬웠지. 아마 그 시기에는 내가 약을 팔았어도 무지 잘 팔렸을 거야.(하하)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믿고 맡길 만한 교육서비스를 제공했던 나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어. 더 이상 내 인생에 ‘장사꾼 아내’라는 타이틀은 없는 것처럼.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마음이 많이 멀어지게 되지.
남편 입장에서도 내가 가게에 나가는 걸 반겨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이어졌어. 인건비 한 푼이라도 줄여보려고 아내인 나에게 지시했던 자잘한 일부터 채용 공고 관리 및 신입 면접과 인사관리, 마케팅 업무, 세금 관련한 것 등등을 이제는 직원들의 업무로 할당했기 때문이지. 그래도 어쩌다 가끔 한 번 매장에 나가긴 했는데, 분위기가 매우 달랐어. 예전처럼 걸레 붙들고 내 맘대로 선반 한 번 닦기가 눈치 보였고 더 이상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박박 닦을 수도 없었지. 사모로서 하는 그러한 행동이 오히려 직원들로 하여금 눈치를 보게 할 테니까.
홈스쿨링 공방 운영이 안정될 무렵, 늘 120%의 에너지를 쏟았던 나에게 번아웃이 찾아오며 다시금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돼. 번아웃이 찾아온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어. 첫째는 수행해야 할 역할이 많다 보니 체력적으로 버거워진 것. 둘째는 그러다 보니 가장 중요한 내 아이들 교육에 예전만큼의 열정이 들지 않는 것. 셋째는 수강생 상담을 하다 보니 굳이 몰라도 되는 이웃들의 사생활까지 알게 되는 것. (아이들 수업을 하다 보면 돌발 행동과 언행으로 가정사를 속속들이 알게 되더라고.) 넷째는 노력 한 만큼 돈을 못 벌고 있다는 현타를 느끼게 된 것. 다섯째는 몇 개월 째 생활비를 받지 않고 돈을 버는 중인데도 기특해 하기는커녕 ‘그깟 푼돈’이라 말하는 장사꾼 남편의 태도였어.
번아웃이 온 이유 중 다섯 번째의 비중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어. ‘우리 마누라는 못하는 게 없네, 살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고, 돈도 잘 벌고, 다른 집 아이들도 가르치고 참 멋있어!’ 이런 남편의 인정을 기대했기에.
글로 풀어 보니 나 자신이 초라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어. 남편의 인정과 관심을 구걸했거든. 그렇다고 신혼 때처럼 지지고 볶고 싸우거나 투정 부리긴 싫더라. 시간도 없었고 감정을 내세울 체력도 되지 않았기에. 그래서 나는 일상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얄미운 남편’을 골려 먹곤 했어. 재미난 몇 가지를 얘기해 볼게.
일단 화법을 좀 바꿨어. 말끝마다 월 천, 월 천, 사업, 사업하는 남편에게 오히려 내가 그런 말을 더 하는 거지. ‘아이고, 천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아이고, 사업하는데 그럴 수 있지, 아직 (새벽) 1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들어왔어? 일찍 왔네~’ 이렇게 놀리는 듯 인정하는 듯 아슬아슬한 화법으로 ‘월 천 버는 남편의 능력’을 추켜세웠지.
두 번째는 일상에서 몇 가지 ‘소심한 복수’를 시전 했어. 일단 과음 한 새벽에 집에 있는 냉수란 냉수는 죄다 버리고 반드시 물을 끓여. 하하. 당시에 우리 집은 보리차나 둥굴레, 양파껍질, 헛개를 직접 끓여 먹었거든. (말린 재료를 사거나 양파 같은 경우는 내가 직접 껍질을 까고 말려서 … 이런 것 하나하나 다 내조였는데.) 과음 후 남편이 냉수를 찾을 때마다 집에 냉수가 없는 상황을 만든 거지. ‘어머, 내 정신 좀 봐, 미안해, 냉수가 없네, 물을 끓여 진작 냉장고에 넣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못했네, 어떡하지, 뜨거운 물뿐이네!’ 이런 식으로. 또 다른 것으로는, 외박하고 들어 온 다음날 갈아입을 양말과 속옷을 다 숨겨 놓는 게 있어. ‘어머 오빠, 미안해, 내가 정신머리가 없어서 빨래를 못했네, 어머 어떡해 미안해.’ 이러면서 입던 속옷과 양말을 또 입고 나가게 했지. 하하. 그 밖에 소심한 복수로는, 해장을 해야 하는데 일부러 카레를 끓여 놓거나 비빔밥을 식단으로 하는 것, 지갑이나 매장 키를 소파 뒤에 던져 놓고 출근 전에 한참을 찾게 하는 것 등이 있어. 하하.
유치하지만 난 이렇게 분을 삭이고 일상을 견디며 지냈어. 이제 와서 보면 나의 이런 행동들도 다 남편에게 관심받고 싶었던 몸부림이었는데. 공방을 운영하고 커리어를 쌓고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면 뭐 해,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는 심정을 숨긴 채 무늬만 부부처럼 사는데.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내실은 초라한 인생이라 여기며 살았어.
한 번은 그런 적도 있어. 이틀째 연락도 없고 집에 들어오지 않던 남편이 너무 미워서 백화점에 가서 비싸 보이는 가방을 골라 결제를 했어. 승인 문자에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바로 연락이 오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아니나 다를까 결제가 되자마자 전화가 오더라. 뭐 하느라 한 번에 200만 원 넘게 돈을 썼냐면서. 이틀 동안 연락도 없고 집에도 안 와서 죽었나 살았나 궁금했다, 이렇게 하면 연락이 올까 싶어 일부러 결제를 해 봤다, 참 허탈하다,라고 받아친 나는 가방을 환불하고 와서 비참한 마음에 펑펑 울었던 적이 있어.
이렇게 다섯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번아웃 이후 친하게 지내던 이웃들과 거리를 두던 나였어. 아이들 수업을 하면서 남의 집 가정사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 신혼부부 전형 임대 아파트였던 터라 경제적인 가정사가 스펙터클 한 부부들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려 노력하는 사람들 찾기가 힘들었거든. 집마다 돌아가며 매일 벌어지는 술 파티, 늘어져 가는 피부, 쪄 가는 살, 그 와중에 자식들은 휴대폰에 방치, 놀이터에 방치, 술 취해 싸우는 부부 등등 못 볼꼴을 너무 많이 보고 못 들을 소리를 너무 많이 듣게 된 나는 인간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며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갔어.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이사계획을 듣게 돼. 소득 기준 초과로 임대 계약 갱신이 되지 않을 것 같다며. 그렇게 우리는 몇 개월 뒤 임대아파트에서 탈출을 하게 되고 난 자연스럽게 홈스쿨링을 정리하며 다시 장사꾼의 아내로 살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