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내가 운이 좀 없어서 그래
둘째 임신 초기에 별거를 하며 한 차례 이혼 위기가 있었던 이슈를 뒤로 하고 나는 아이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 이후 더 힘들었어. 진솔한 얘기를 하며 서로의 진심을 듣는 시간이 생략된 채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그저 꾹꾹 누르고 참는 시간만 흘러갔지.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좀 안 좋은 결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고나 할까? 부부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상처를 치유하기에 감당해야 할 현실은 너무 벅찼어. 남편은 매일 장사를 하며, 둘째를 임신한 나는 세 살 짜리 아이를 혼자 돌보며, 그렇게 지냈던 게 전부였어. 그리고 여름이 되어 둘째를 출산하였고. 또 일이 생겨. 바로, 음주운전으로 인한 면허취소 사건.
“남자가 사업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음주 운전하다가 면허가 정지, 취소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어.”
“안 그런 사람들? 없어. 그냥 다 운 좋게 안 걸리고 사는 거지. 근데 나는 이런 운이 좀 없는 편이라, 어쩌다 딱 한 번 음주 운전한 게 걸린 거야. 이런 쪽으론 재수가 좀 없는 거고. 벌금? 내가 알아서 다 낼 거야.”
“음주운전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반대편으로 술자리 옮기다가 대리 부르기 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야. 형들도 애들도 다 운전대 잡았어. 내가 뭐 사고를 내고 싶어서 냈냐?”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둘째를 불안한 마음으로 밤중 수유하며 부르르 했던 그날 밤 이후, 남편에게 몇 달간 들었던 말들이야. 자초지종을 들으니 단순히 음주 검문에 단속된 것이 아니었어. 사고가 있었건 거지.
남편이 설명한 건 이래. 그날 술자리를 하며 무리 지어서 반대편 도로에 있는 유흥가로 이동 중이었는데, 앞서 가던 모르는 차들의 접촉사고 현장을 지나가다 일행들이 급정거를 하게 되었대. 서행 중이어서 급정거였어도 다 멈췄는데, 맨 뒤에 있던 남편 차만 급정거가 안 됐고 바로 앞에 있던 차량을 들이받은 거지.
"운전하던 차가 밀리지만 않았어도 앞차(X6)를 받을 일이 없었고, 수습하면서 음주 단속에 걸리지도 않았을 텐데 진작에 차를 바꿔야 했나, 아 그런데 진~짜 빡빡했던 터라 차가 안 받히는 게 이상할 정도인데 X6가 정말 좋은 차긴 하더라 하하하하. 하지만 X6랑 사고가 났으니 나는 앞으로 X6는 절대 안 사야지 하하하하…"
이러는 남편을 보며 울화통이 터졌어. 그리곤, 자기도 너무 화가 나고 짜증 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여러 말 말고 그냥 넘어가라고 얘기하는데 … 하 정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어. ‘개 같은 소리에도 유분수가 있다’라는 속담 알아? 당연히 모를 거야. 내가 만든 속담이거든. (하하)
출산 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하루하루 너무 힘든 상태였어. 아이 두 명을 홀로 케어하면서 육체가 고된 것도 있지만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수유를 한 영향인지 둘째가 야경증 증상을 보였거든. 하지만 이 와중에 나를 가장 힘들 게 한 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남편의 뻔뻔함이었어. 남편을 백 번 믿어서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몸조리 중인 산모가 밤중에 경찰 전화를 받고 불안 해 하며 기다린 것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었어. ‘많이 놀랬지, 오빠가 미안하다.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놀라게 한 것 정말 미안하다. 더 놀랄 일 없게 수습 잘하겠다.’라고 말하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워낙 큰 사건이라 여파는 길었어. 잊어버릴 만하면 공문이 날아오고 벌금이 선고되고 …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싸웠지. 2천만 원의 벌금을 낼 때도 역시나 남편은 ‘그 돈 내가 다 버니까 너는 상관하지 마라. 내가 다 알아서 갚을 거다. 언제 너 보고 돈 벌어 오라 했냐.’라고 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기가 막힌 일이 생겨. 바야흐로 추석연휴였는데 이때 남편이 뭘 했는 줄 알아? 충남 시댁 시골집에 내려가는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스타렉스를 개조한 캠핑카를 빌려. 왜? 사고 이후 폐차해서 차가 없기도 했지만 마누라 콧바람 쐬어주고 기분 전환시킨다는 이유로. 하하하하하. 나와 한마디 상의 없이 수 십만 원을 들여 캠핑카를 예약 한 남편은 차가 크니 돌아오는 명절에는 시아버지까지 모시고 캠핑카로 함께 이동하자고 하지.
캠핑카를 예약했을 때가 둘째 낳은 지 50일 … 나는 진짜 이 남자의 이기심에 여전사모드가 됐어. 아무리 시아빠와 딸처럼 지내는 며느리였어도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백일도 안 된 신생아 젖을 물려야 하는데, 캠핑카 동승?? 도대체 수유를 어디서 하란 말인가, 싶더라고.
당시의 캠핑카는 요즘의 럭셔리 한 캠핑카를 생각해서는 절대 안 돼. 승차감 완전 안 좋은, 그리고 최고 속도가 70km밖에 나가지 않는 그런 컨디션이었거든. 당연히 방이 나뉘어 있는 구조도 아니었고. 음 … 뭐랄까 마치 ‘뚜껑 있는 최고급 경운기’를 타고 이동하는 느낌이랄까.
더구나 야경증으로 밤마다 열세 번씩 깨는 둘째 때문에 늘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나인데 ‘면허 취소 남편’을 대신해 운전까지 할지도 모른다는 것 자체가 부담만 배였어. 신생아라 1시간마다 젖을 먹던 때야. 나는 상상했지. 1시간 운전하고, 20분 수유하고, 1시간 운전하고 20분 수유하고 … 이렇게 이동할 생각을 하니까 진짜 환장할 노릇이더라고. 남편은 진짜 남의 편이다, 싶었어. 나는 사정했어. 내가 몰던 승용차를 타고 우리 네 식구끼리 내려갔다 오던가 아버님만 모시고 오빠가 둘이 다녀오던가 했으면 좋겠다고. 신생아여서 가까운 친정도 안 가는 마당에 추석 스케줄을 다시 생각해 봐 달라고 했어.
하지만 이때에도 남편은 (분노주의) ‘내가 내 돈 벌어 쓰는 데 감사하다고는 못할 망정, 뭐가 또 이렇게 불만이 많으냐. 젖 물리는 거 뒤돌아 앉아서 물리면 되고, 운전은 내가 할 거니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아직 선고가 떨어지지 않아서 취소된 거 아니니 운전해도 괜찮다, 네가 나 아니면 캠핑카를 타보기나 하겠냐, 큰 아이도 좋아할 거다. 신생아 때는 당연히 그만큼 힘들지 왜 또 너만 힘든 것처럼 얘기하냐, 애 키우는 거 유세 떨지 말라고 했지 않냐, 시골에 있는 (본인의) 작은엄마 봐라, 애를 셋이나 낳고 키워도 저렇게 행복하게 사시는 거 봐라.’라고 말했어.
결국, 나는 남편의 명령(?)대로 ‘뚜껑 있는 최고급 경운기’를 타고 태안에 내려 가. 온갖 짐을 바리바리 싸서. 남편은 운전을 하고 시아버지는 당신 아들 옆자리에 앉은 채, 나는 뒤에서 신생아였던 둘째를 품에 안고 세 살 큰아이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가며. 벨트도 없고 그냥 뭐.. 방바닥 같은 캠핑카 뒷자리였거든. 한눈팔면 아이가 데굴데굴 구르기 딱 좋아. 당연히 쪽잠은 잘 수가 없고 신생아였던 둘째를 품에서 한 번도 내려놓지 못하고 왕복 이동했지. 그 와중에 면허가 곧 취소될 남편이 운전하는 상황을 불안해하며.
그런 마누라 속도 모르고 남편은 캠핑카 이용 후기를 장모님에게 의기양양하게 얘기했어. 내 지인들을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였지. 얘가 나 아니면 캠핑카를 타보기나 하겠냐고. 나랑 사니까 이런 경험도 하는 거라고. 얘는 나랑 사는 걸 행복하게 여겨야 한다고.
좋아, 너무 좋아, 나 너랑 살아서 너무 행복해. 그런데, 굳이 출산한 지 두 달 밖에 안 된 때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네. 그게 과연 아내 마음 풀어주기 위해, 기분 전환시켜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마땅한 일인가 싶네.
굳이 그렇게 돈 쓰지 않아도, 과시하지 않아도, 그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면 그걸로 아내는 마음이 편안할 텐데. 가정에 소홀한 것, 무지해서 잘 모르는 것, 시간이 좀 지났더라도 성찰하며 발전하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면 아내는 기분전환 제대로 한 것 마냥 마음이 가벼웠을 텐데.
면허 취소가 최종 선고되고, 큰소리친 대로 남편은 벌금도 납부했어. 이후에 남편은 사과를 했을까? 아니야, 나는 지금까지도 남편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어.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던 남편은 ‘나랑 살 거면 네가 누리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라’라고 지속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했고 이건 현재도 유효 한 조건이야. 면허 취소 이후 남편이 더 일에 매달릴수록, 매출이 올라 갈수록 자아성찰은 멀어져 갔지.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는 장사꾼 남편의 자의식, 막말과 행동은 분명 장사꾼 아내에게 상처로 남았고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것들이야. 따라서 장사꾼 아내로서 나는 지옥과 같은 현실을 바꾸려 하기 시작해. 나 자신도 바꾸고, 상황도 바꿔야겠다,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지. 그게 과연 뭘 까? 다음 화에서 이어갈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