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오너의 굳은 심지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 가정을 등한시하는 장사꾼이 된 남편, 신혼부부 아파트에 입성하여 이웃 사귀는 재미에 푹 빠진 장사꾼 아내, 그러한 상태로 몇 개월을 지내던 시기였어.
당시를 회상해 보면 남편도 나름대로 가족들에게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을 거라 생각해. 잦은 외박과 혼자만 맛있는 거 먹고, 좋은 데(?) 가고 하는 것에 대해 말이야. 늘 술에 젖어 있는 상태였기에 말하기도 힘들다는 이유로, 그게 아니라면 바쁘다는 핑계로 대화의 시간을 갖지 못했을 뿐이었겠지?
그리고 … 남편이 나보다 지혜로웠다고 할 수 있는 점은, 결혼생활을 하는 데 있어 당근과 채찍을 시전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느냐, 다 내가 벌어 준 돈으로 먹고살지 않느냐.’ 하다 가도 ‘우리 마누라가 알아서 척척 집안일도 하고 딸도 잘 키우니까 내가 밖에서 집중할 수 있는 거야.’ 라고 말할 때도 있었거든. 나는 열 번의 질책에 분노가 쌓여 있다가도 한 번의 칭찬에 그것들을 꾹 누르고 지냈어. 그 한 번의 칭찬은 심지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부스터로 작용해 나를 불타오르게 만들기도 했지.(퐈이아)
누구나 느낄 거야.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배우자로부터 인정받으면 헤쳐 갈 힘이 불끈불끈 솟아난다는 걸. 어떠한 시련이 덮쳐도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배우자의 인정이지.
남편은 ‘남자가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나랑 사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말하며 열 번을 상처 주다 가도 반전 매력의 ‘츤데레 남편’이 되어 한 번의 달콤한 칭찬으로 내 눈을 하트로 만들고 몸과 마음을 열게 했어. (당시 내가 20대여서 가능했던 거 아닐까 해 ^^)
하지만 이런 상황도 여러 차례 반복되다 보니 나에게는 또 회의감이 찾아왔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시기가 바로 나의 20대 마지막이었거든. “계속 이렇게 참으며 살아야 할까? 대충 이렇게 살다 보면 또 별일 없이 일상을 지내게 되는 것이니 묻고 살면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점점 커졌지. 당시에는 남편이 독박 돈벌이를 하니까, 내가 독박 육아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던 때이기도 하고.
이런 내 감정의 변화를 남편도 어느 날 느꼈는지 일상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어. 집에 아줌마들 불러서 밥 먹이지도 말아라, 정신 나간 여편네들 하소연 들어주지 말아라, 모여서 신랑 험담이나 하고 그러지 말아라, 능력 없는 남편 둔 여자들이랑 어울리지 말아라, 등등 … 하지만 이미 내 감정은 멀어져 있었던 터라 싸움밖에 나지 않았어. “오빠가 나랑 놀아주지 않으니까 동네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엊그제 집에 안 들어온 거 사과 안 해? 뭘 잘했다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라고 받아치는 나였지.
울분이 폭발 한 나에게 남편은 도리어 적반하장이었어. (※분노 주의)
“장사하는 게 쉬운 줄 아냐, 일하다 보면 술자리 길어져서 집에 못 올 수도 있고 연락 못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지금 말할 힘도 없이 힘드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닥쳐라, 미안해서 차마 말도 못 하고 넘어가는 건데 왜 지랄이냐, 정신 나간 여편네들이 너한테 무슨 헛바람을 넣은 것이냐, 꼴랑 2-300만 원 버는 남자랑 사는 여자가 부러운 것이냐, 같이 장사할 때는 고분고분하더니 어떤 여편네가 너를 망쳐 놓은 것이냐, 집에서 살림만 하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네가 사회생활 못 해보고 나랑 일찍 장사를 시작해서 철이 없는 것이다, 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 내가 돈 안 갖다 주면 일주일이나 살 수 있는 줄 아느냐, 넌 나랑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로 나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지속적으로 주었지.
장사꾼 남편은 돈 잘 버는 시기에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아내에게 말하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해. 혹여나 인성쓰레기처럼 보일까 봐 말로 내뱉지는 못해도 행동이 그러하지는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해.
처음에는 분명 구멍가게에서 장사로 시작했는데, 규모가 커지고 매출이 커지고 직원이 많아지면서 사업가나 기업가를 꿈꾸게 되는 시기가 되면 장사꾼의 자아는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져, 그리곤 가정에 소홀해 져.
사업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좀 얘기해 볼 게. 포부 넘치게 덤볐지만 세상으로부터 좌절을 몇 번 겪어. 그러고 나면 오너로서 고민이 많아지면서 스스로 내린 결정에 흔들리지 않으려 다른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기도 하지. 또, 고독하다 보니 자기 최면, 자기 암시 등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습관을 갖기도 하거든. 이때 혼자 하는 생각 중에 ‘난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여기까지 내 힘으로 왔어, 난 정말 잘하고 있어, 힘들어도 버텨보자.’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지나치면 가족 구성원이나 회사 조직원들에게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를 드러내게 되지.
물론 적정 수준의 자기 위로를 행함으로써 흔들리는 멘털을 붙잡고 선택한 결정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좋은 태도야.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주변 사람들이 불쾌해질 수 있겠지? 가장 고통받는 것은 가족이고 특히나 아내가 될 수밖에 없어. 권력이 높아지는 만큼 아내도 위상을 세워주겠지만 한편으론 이것에 대한 공로를 오로지 자신에게 부여하며 혼자 다 일궈낸 것이라고 착각하고 아내를 무시할 수 있거든.
당시 남편이 나에게 퍼부은 말들 역시 이 착각에 빠져 교만하게 내뱉은 말이야. 장사꾼이 집에 들어오거나 안 들어오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못 벌거나, 집에서 살림하며 아이 키우며 음식을 준비하며 일상을 평범하게 만들어준 장사꾼 아내의 노력은 교만에 빠진 남편으로 인해 가슴속 상처를 누적하며 살게 돼.
지금은 어떨까? 당시보다 9년이 지난 지금은 아주 많이 착한 남편이 됐어. 남편은 40대 중반을 넘어섰고, 앞으로 더 연재할 내용이지만 사업하면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다 보니 세상 이치에 데고 깎여서 그때보다는 겸손하게 살아. 아내에게 많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됐고, 이때보다 훨씬 배려심이 깊어졌지. 이렇게 변했으니 아직까지 이혼하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하.
장사꾼의 아내는 번듯한 명함도 없고 명예도 없지만, 국가에서 인증서를 발행해야 할 만큼 엄청난 인내심의 장인이야. 정말, 그런 것 같아. 수 십 년 한 길을 파온 장사꾼도 대단하지만 그 옆을 묵묵히 지켜온 장사꾼의 아내, 난 그분들을 더 존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