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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엉겅퀴 Jun 14. 2024

건방진 부부

12화 위험한 우월감에 젖어있던 시절

빌라 월세 살이를 탈출하며 본격적인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나는 자녀 교육과 부동산에 많은 관심을 갖게 돼. 당분간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것도 참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2년이 채 걸리지 않는데 어쨌든 그 당시엔 잠깐이나마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지. 그러니 자연스럽게 살림하는 것이나 자녀 교육에 포커스 온 할 수 있었어. 



늘어난 매장과 매출, 그리고 직원들로 인해 장사꾼 아내로서의 역할이 줄어들며 남편과 장사하는 것에서 멀어졌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직원을 한 두 명 거느릴 때에는 개인적인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어서 상사 입장에서도 친근감을 형성하는 것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데, 10명 내외의 조직 규모가 되니까 전혀 분위기가 달랐어. 직원들이 사모님, 사모님 하는 소리에 마치 내 몸은 알레르기 반응이 이는 것 같았지. 



또 아이가 많이 어렸던 터라 기관에 보내기엔 이른 시기어서 가게에 나가려면 친정에 아이를 맡겨야 했는데 그렇게 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 왜? 남편이 돈을 잘 벌어 다 주니까. 



이 시기에는 일정하게 생활비를 받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돈을 받거나 주로 신용카드를 썼어. 하지만 나는 이때 문화센터를 다니지도 않았고 아이 옷을 쇼핑하러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외식하는 걸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거든. 사교육이 아닌 엄마표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아서 아이를 데리고 집에서 오감발달 놀이를 많이 하고 지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남편이 버는 돈에 비해 돈 쓸 일이 없었어.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주로 돈을 쓰게 되면 마트에서 식재료를 샀는데 ‘식구들 먹일 음식을 건강하고 맛있게 만드는 것’이 당시 나의 낙(樂)이었어. 귀여운 도트 무늬의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 준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리는 예쁘고 섹시한 와이프 … 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 현실은 그렇지 않고 그냥, 남편 저녁상 차리는 평범한 아줌마였어. 하하.





식단을 짜서 매일 다르게 메인 요리를 하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밑반찬을 만들고 유아용 식사까지 따로 만들며 지냈는데, 블로그에 꼬박꼬박 기록하며 온라인으로도 열정을 불태웠지. 지금이야 인플루언서라고 하지만 10년 전에는 ‘파워블로거’ 즉, 파블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 파블 생활도 인생을 즐겁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어. 



요리와 파블생활로 온오프라인에서 모든 생활이 너무 즐거웠던 때야. 이 이상적인 가정주부의 생활에 있어 세 번째 재미는 새로운 육아맘과의 소통이었어. 아파트 주민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많이 만나게 돼. 옆집 윗집 아랫집은 뭐 거의 베프 수준이 되고 말이야.



친목도모의 결정적 계기에는 요리가 빠질 수 없어. 당시에 나는 밑반찬 등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주변 이웃들에게 나눠주곤 했어. 요리를 잘하는 여자와 만나서는 요리 얘기 하느라 정신이 없고, 요리를 못하는 여자와 만나면 알려주느라 정신이 없고 … 그러다 애를 어떻게 낳았고, 어떻게 키울 것이고, 이 시기에는 어떤 게 좋고,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고 … 이런 얘기들을 주로 했던 것 같아. 지나온 인생은 다르지만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살며 환경이 비슷하다 보니 금세 친해졌고, 비슷한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과는 깊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어. 그러다 보면 당연히 남편 얘기는 빠질 수 없는 부분인데,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자상해 보이는’ 남편의 모습과 ‘경제적으로 능력 있어 보이는’ 아내의 모습이었어. 



20대 초반에 남편을 만나 남편 얘기만 듣고 살았던 터라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몰랐 던 나는, 장사꾼의 아내로 살면서 가게에만 매달려 살던 나는, “남자=돈 벌기 여자=내조 및 살림”이라는 사고로 살던 나는, 이웃집 신랑이 퇴근 후 집안일을 도와주고 아이와 놀아주는 모습을 처음 보게 돼. 토요일은 물론이요 일요일마저도 술에 취해 있는 남편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나는 홀로 놀이터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데, 이웃집 아내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단정한 차림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게 돼. 정말, 매일이 생경(生硬)했어. 그리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그 시기에 남편 역시 점점 바빠지며 세 식구가 온전히 함께 먹는 저녁식사마저도 횟수가 줄어들었어.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아침은 늘 속이 안 좋아 거르고, 점심은 매장에서 먹고, 저녁은 8시 전후로 퇴근해 꼭 가족과 함께 먹는 사람이었는데, 아파트 입주 후는 더 바빠져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 나중에는 거의 매일 자정이 다 되어 들어오거나 아예 하루 이틀 외박을 하기도 해서 오히려 저녁을 같이 먹는 날 수를 세는 게 더 빠른 정도가 됐어.





처음에는 잔뜩 차려 놓았는데 너무 늦게 와 음식이 식어버리거나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늦은 귀가를 전화로 통보하는 남편에게 실망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망감이 들긴 하더라고.



그런데 상황이 반복되며 누적되니까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 알면서, 저녁 차리고 있는 거 알면서, 어쩌다 한 번 밥 차리는 아내도 아니고 늘 이러고 사는 거 알면서, 사람 엿 먹이는 건가? 내가 우습나?’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 생각도 아주 잠깐이었던 게 아파트에서 만난 이웃들 있잖아.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분노가 오래가진 않았어. 남편의 귀가가 늦는 날이면 남편을 위해 만든 그 많은 음식들을 외부 사람들과 공유하며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들었지. 그 시간을 통해 부부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진 것도 있지만 통찰력 없던 나에게 더 크게 자리 잡은 생각이 있었어. 이 얘기를 하고 이번 편을 마무리 지으려 해.



장사꾼 남편의 부재로 직장생활을 하는 이웃들과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그 아파트가 신혼부부 전형의 임대 아파트였기에 다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거였어. 여자들 대부분이 주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다들 휴직 중인 사람들이었어. 그게 아니라면 집에서 부업을 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다른 직업에 대한 교육을 받는 사람 있었지.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걱정 없이 살았어. 아이 하나 키우며 궁핍함 없이 살림만 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알아? 사람은 소통을 하면서 발전도 하지만 속으론 타인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며 우월감을 갖는다는 걸. 겉으로는 남을 부러워하는 척하며 ‘에이, 저런 건 별로다, 내가 더 낫지.’ 이런 생각을 해. 어떤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우러러보다 가도 그 사람의 부정적인 상황을 알게 되면 ‘것 봐. 차라리 내가 나아’하는 것이 사람 심리야. 남편이 가정에 소홀해 지는 탓에 한편으론 심심하고 외로운 것도 있었지만, 나 역시 그런 심리가 아주 제대로 작용해서 아파트 주민들과 빈번하게 어울렸던 거라고 할 수 있어.



다음 연재에서 이어 갈 얘기지만 남편과의 갈등이 생기면서 나는 남편 탓을 했어. ‘나랑 안 놀아 주니까 내가 다른 사람이랑 놀지!’하면서. 하지만 남편 탓 보다도 문제는 내 마음에 있었던 것인데 말이야. 외형적 상황이 비슷한 입주민들 사이에서 우월하다는 의식에 사로 잡혀 안정감 있는 삶을 살았어도 겸손함을 지니지 못했어. 오히려 속으로는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잘못된 자존감을 높였지. ‘저 사람들과 나는 달라, 내 남편은 능력 있는 사람이야, 난 그를 내조하는 대단한 여자이고.’라는 생각으로.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나는 아무 문제없는 팔색조 아내인데 사업한다는 핑계로 가정에 무심한 남편은 세상 쓰레기다, 돈 밖에 모른다 이런 뉘앙스를 사람들에게 풍기며 살게 돼. 내 얼굴에 침 뱉는 줄도 모르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상황이 돌이켜 보면 참 어리석다. 우리 부부도 돈이 없고 집이 없으니 그 임대아파트에 입주한 것인데 말이야. 입주 시 서류상 수입과 차이가 나는 형편이 되자 ‘나는 저들과 달라’ 하며 콧대를 세웠던 게 가소롭지.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사장님 놀이’를 하며 우월감에 젖어 생활한 남편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 시기에 건방짐이 하늘을 찔렀던 것 같아. 한마디로 우리는 건방진 부부였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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