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단문
*‘한낮’에서 이어집니다.
그 이상한 감각을 다시 느낀 건 머리가 굵어진 다음이었다. 14살쯤 되었을 무렵 우리 집에는 우환이 계속되었다. 제일 먼저 사라진 건 고모였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우는 광경을 처음 목도했다.
“고모한테 인사해라.”
얼굴도 잘 모르는 사이였다. 한 마디로, 소원한 사이. 등을 짓누르던 아버지의 손길. 그 감각이 천 너머로도 생생했다. 몸에 엉성하게 걸친 정장 재킷과 받쳐 입은 셔츠의 촉감이 낯설었다. 갑자기 닥친 일에 집에 입을 것이 없어 아버지가 급하게 빌려온 사촌의 옷이었다. 사촌은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나는 아직 내가 ‘클 일’만 남았다고 주장했다.
영안실에 조용히 누워있는 고모는 차가웠다. 아버지 몰래 어깨를 툭 건드렸을 때 그 온도에 놀라 내심 펄쩍 뛰던 것을 겨우 삭였다. 검지 아래로 만져지는 굳은 살덩이. 사람의 영혼에 대해 외치던 사이비 포교인이 생각났다. 그럼 고모는 영혼이 빠져나갔으니까 뭐라고 불러야 하지. 고모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내가 지금 보는 고모의 모습이 그가 가장 빛나는 때일 거였다.
“…다영이는 활발한 애였다. 강이고 들이고 쏘다니면서 어머니 혼을 쏙 빼놨지. 녀석, 선머슴같이 굴면서….”
“아버지, 취하셨어요.”
“그래도 되는 날 아니겠니? 이리 와 봐라.”
이건 안 좋았다. 아버지가 저렇게 구는 건 곧 끝없는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장광설. 나는 손님이 오셨다는 핑계를 대고 아버지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을 분명히 봤는데. 먹칠이 된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눈빛도, 입매도.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두 번째로 사라진 게 아버지였으니 그게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다들 나보고 불쌍한 애라고 했다. 막상 나는 딱히 슬프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친척들 몰래 눈가에 물을 묻히기도 했다. 그러면 모두가 내 등을 쓰다듬거나 조용히 봉투 하나씩을 품에 안겨주었다. 조의금과는 다른 의미겠거니 생각했다.
“쟤가 걘가? 어린 녀석이 딱하게도….”
“들리겠어요.”
“어이쿠.”
손님 하나가 자리를 떴다. 오래 앉아있으니 다리가 저렸다. 다들 나보고 좀 쉬라고 했다. 나는 그저 아버지 곁에 있겠다고 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그 말에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저 아버지의 말을 지킨 것뿐이었다.
‘다영아….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내가 추울 때 아버지가 항상 차를 타고 데리러 왔었다. 그 기억에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면 된 거죠, 아버지?
3일째 되는 날 늦은 밤, 검은 정장을 입은 마른 중년의 여성이 찾아왔다.
“…영호야.”
내 이름을 정확하게 아는 걸 보니 아버지의 친한 친척이겠지, 싶었다. 나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기계적인 인사에도 여자는 나를 계속 바라봤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우리 둘의 시선이 엉겼다. 내게 뻗는 손길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 영호.”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여자의 얼굴이 나와 판박이였다. 그는 나를 꽉 안았다.
“많이 컸구나.”
“…엄마?”
벽을 부수는 직감이었다. 마치 태중에 있는 듯한 안락함이 나를 삽시간에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