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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트 Mar 08. 2024

꼬리잡기

창작 단문


땅을 박차고 내달리는 발걸음이 조급해졌다. 사샤, 달려! 어딘가에서 응원이 들려왔다. 넌 할 수 있어. 텅, 텅하고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몸의 솜털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잡히면 어떻게 될지 알잖아. 사샤, 너만이라도 도망가. 내 언니. 사샤는 말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하나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어린 나를 사샤, 3살 많은 언니를 슈라라고 불렀다.


“그치만 *슈라는 남자애 이름이잖아.”

“우리끼리는 사샤야. 그러면 어떨까?”

“응! 좋아! 언니도 사샤야. 나도 사샤.”


알렉산드라 세르게이비치 토리오.

슈라.


사샤는 항상 나를 이끌었다. 내 어린 다리가 설원 위를 뒹굴 때마다 사샤! 이리 와, 라며 까르르 웃었다. 하얀 설탕같이 소복이 덮인 토지 위에서 우리는 뛰놀았다. 조금만 더 가면 얼어붙은 호수가 있었다.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흐릿하게 비치는 얼음 위 우리의 모습이 새끼 여우 같았다. 나는 스케이트를 번쩍 들어 날로 귀를 만들었고 그러면 여우는 힝, 헹하고 울었다. 사샤! 응, 언니, 갈게. 여우는 다시 내달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여우는 기쁘게 울지 않았다. 대신 거실에 있는 거대한 전신 거울 안에 앉아 있었다. 사샤, 뭘 보니! 이리 와. 목욕 시간이야. 엄격한 어머니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바삐 움직여야 했다. 언니는 항상 굳은 얼굴로 있다가도 내가 다가가면 부모님의 눈을 피해 씩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 입을 막고 낄낄거렸다.


오늘도 그런 날이겠지. 나는 고민하다 중앙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그런데 언니가 없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평소와 다르게 스펀지 대신 리본이 들려 있었다.


알렉시 세르게이비치 토리오.

사샤.


내 냄새가 길을 낼 거야. 그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보이지 않는 향기의 선이 내 옷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찌직. 어머니가 곱게 입힌 드레스 자락이 찢어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눈물을 흘리는 건 그 때문이 아니라,


“사샤!”


여기 오지 못해. 당장. 우렁찬 이방인의 목소리는 마치 나를 안다는 듯 애칭을 불러댔다. 당신을 몰라요. 난 가기 싫어. 언니! 도와줘.


넓은 저택 안에서 몇 번이고 했던 술래잡기를 떠올렸다. 언니는 귀신같이 내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마치 모든 가구가 투명한 것처럼. 옆 마을의 미하일처럼 눈만 가린 것도 아닌데. 치이. 나는 또 져버리곤 부루퉁하게 섰었다. 언니는 대신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자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또 언니에게 홀랑 넘어갔었다.

차라리 냉장고에 들어가면 나을까? 아냐, 언니도 예상 못 할 거야. 난 언니를 만나서 여길 떠날 거야. 언니가 내 옆에 있을 거야.


‘과연 그럴까?’


처음으로 든 생각에 나는 순간 촘촘한 나무 바닥에 나자빠졌다. 코를 찧었는지 얼굴 부리가 욱신거렸다. 급하게 일어나다 드레스 반대쪽이 서랍장에 걸려 찢어졌다. 나는 그대로 드레스를 잡아 뜯고 달렸다. 언니 방! 거기로 가자.


다행히 비밀 통로-덤웨이터-로 올라갈 수 있었다. 부엌에 있는 수많은 반짝이들 중에서 제일 유용한 물건이었다. 나는 그걸 타고 제일 꼭대기인 4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에서 씨근덕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통로를 타고 올랐다. 어둡고 추웠지만 나는 두 손을 꽉 붙들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언니만 돌아오면…!


다락방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좁고 추웠다. 최근 어른들이 고개를 휘적대며 인상을 쓰더니 다 추워서 그랬던 건가? 호기심에 TV가 있는 안방으로 가려했지만 아주 손쉽게 만류당했다. 다락은 다들 창고로 쓰기도 하는 장소였다. 창문 아래에는 각기 크기가 다른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는 항상 가려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 중 하나를 덮은 모포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언니가 있던 곳은 너무 밝아서 들킬 거니까.


앉자마자 땀이 안톤 아저씨처럼 쏟아졌다. 아저씨보고 매일 손수건 안 가져왔냐고 놀린 벌일까?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다리가 도자기 인형처럼 널브러졌다. 아래에서 나를 찾는 어른들의 소리가 들렸다.


아까 깨져버린 코끝에서 심장이 뛰었다. 다칠 때마다 그곳에서 박동이 느껴졌다. 마치 심장이 두 개가 된 것 같았다. 심장이 여러 개면 좋은 거 아냐? 언니는 말했다. 그때의 언니는 나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히죽거리며 언니 심장은 조용하대요!라고 외치며 빙글빙글 주위를 돌았다.


“사샤!”

“언니?”


창백해진 얼굴의 언니가 바닥에 떨어진 내 손을 잡았다. 언니도 이곳에서 오래 머물렀는지 손이 차가웠다. 내가 오히려 더 따뜻할 정도였다.


“기다렸어.”

“언니, 언니이….”

“응.”


언니는 나를 꼭 껴안았다. 차갑지만 누구보다 안정감을 주는 두 팔에 있으니 나 자신이 무쇠처럼 느껴졌다.


“그 녀석들이 와.”

“싫어.”

“잡으러 올 거야.”

“싫어!”


그 눈빛은 푸르게 반짝이며 나를 마주했다. 언니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대신 내가 갈 수 있다면….'


내 외침이 강렬했던지 다락 쪽으로 발소리가 우르르 쏟아졌다. 나는 언니의 품 안에서 떨었다. 떨림이 나아질 즈음 어른들의 소리가 우렁차게 방 안을 울렸다. 나는 기다리다 언니를 밀어내고 대신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본 언니의 표정이 서글퍼서 내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렀다. 울어서일까 아파서일까, 코끝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이번에는 내가 언니를 지켜줄게. 나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어른들은 나를 잡아가느라 언니를 잊었는지 상자 쪽을 더 뒤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다시 씻기고 향기 나는 옷을 입혔다. 웅웅, 벌 우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우고…. 나는 결국 집 밖으로 끌려갔다. 저택을 돌아본 나는 다시 한번 울음을 터뜨렸다.


저 먼 창문에 여우가 있었다. 그것은 나를 보고 발 한쪽을 창문에 디뎠다.

언니.


*슈라: 알렉산드르의 러시아식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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