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술 한잔 더 하자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는 배시시 웃으며 마침 맛있는 맥주가 있다고 했다. 이미 취했던 나는 무조건 좋다고 했다. 엊그제 비가 한번 오고 날이 꽤나 쌀쌀해서 어디든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비록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집에 초대하는 그의 호의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술기운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는 근처 투룸에서 혼자 살았다. 신축은 아니었으나 깔끔하게 관리된 건물이었고 12시가 조금 넘어서 불이 다 꺼져 있었다. 울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2층 구석으로 향했다. 202호였다. 쓰레기통과 고양이 꼬리 모양의 마스크 걸이가 눈에 띄는 현관을 지나자 널찍한 방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책과 잡다한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블라인드 너머에서 가로등 불빛이 세어 들어왔다. 그는 식탁을 급히 닦고 잔을 놓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단 손님이니까 앉아 있도록 해. 금방인데 뭘.”
검고 매트한 재질에 오목하게 들어간 타원형의 식탁이었다. 그가 대충 던져 놓은 젓가락을 자리에 맞춰 놓는 동안 전자레인지에서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났다. 곧 소시지와 치킨 몇 조각, 치즈를 놓고 우리는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달달한 계피향을 시작으로 초콜릿과 커피 비슷한 향이 감돌았다.
“지인에게 받은 특별한 맥주인데 드디어 마시네! 어때, 괜찮아?”
평소 소주를 주로 마시던 나는 마음에 쏙 든다며 소리 내어 입맛을 다셨다. 그는 혼자 마시기에 아까웠다며 다시금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불렀다. 한참을 이야기한 느낌이었으나 고작 새벽 한 시였다. 내숭 떠는 것이 싫다고 먼저 내비친 것은 그였다. 이미 서른 중반을 넘어가서 닳을 대로 닳은 연애 세포들을 총동원했다며 내 옆으로 온 것이다.
“싫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손등으로 그의 손바닥이 올라왔고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성인이 뭐람, 다 큰 것을 넘어 가정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우리였다. 해볼 만큼 연애도 해봤고 이런 관계가 처음도 아니었으며 내숭, 오히려 싫어했다. 화끈 달아오르는 목덜미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진심이 아닐까, 되뇌며 거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 일을 그르치면 냉랭해지다 못해 다시 이어 붙일 기회가 영영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나는 다가오는 그를 막아설 수 없었고 그 또한 멈추지 않았다. 안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어깨와 허리를 따라 선선한 밤바람이 스치면, 그의 손이 그 흔적을 좇듯 몸을 덥혀주었다. 그리고 정신 차리니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화장실에 간 그를 따라 식탁에 다시 앉았던 나는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김이 빠졌는데도 옅은 향이 남아있었다. 차가워진 소시지를 오물거리며 그의 책상으로 갔다. 작은 사진들, 그중에서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늬로 보아 참새였고 살짝 벌어진 부리와 질끈 감은 눈 뒤로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자신이 찍은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며, 엽서의 절반 정도로 인화한 다음 책갈피로 사용한다고 했다. 일종의 수집품처럼 그는 종종 자신이 찍어 둔 사진들을 모아서 엽서로 만들었다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하나씩 잘 보이도록 펼쳤다. 새파란 하늘과 전봇대, 샛노란 어느 밭고랑이나 촘촘히 자라난 허브들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흰색 테두리 안에서 강렬한 색감을 냈다.
“색에 특히 신경을 쓴 것들이야. 거기 있는 것들은 평소에 쓰는 거고, 고이 모셔 둔 것은 따로 있지.”
그는 보여줄 게 있다며 안방에 들어갔다. 서랍여는 소리와 빈 종이 상자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애가 생각보다 강하네, 하며 책상을 둘러봤다. 모서리에 딱 끼워 맞춰진 책상에는 세계문학 전집 몇 권과 철학에 관한 책 몇 권, 포장이 뜯어지지 않은 노트와 말끔한 화병 하나가 보였다. 검은색 스탠드가 노란빛으로 바닥을 비추니 나뭇결이 유독 눈에 띄었고, 무늬 없이 투명한 화병과 가지런히 늘어선 꽃들과 제법 어울렸다. 노란 튤립과 동그란 국화에 이름 모를 잎사귀 몇 장이었다. 그런 미적 감각을 갖고 있었기에 엽서로 쓸 사진을 직접 찍고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겠다.
그중에서도 눈에 띈 것은 죽은 새를 찍은 사진이었다. 열 장은 족히 넘는 사진들 사이에서 딱 두 장이었다. 하나는 앞서 본 참새였다. 다른 하나는 조금 더 큰 녀석이 양 날개를 펴고 퍼질러져 있었다. 차에 깔린 것인지 거뭇한 날개와 버섯이 자라듯 몸에서 뻗어 나오는 솜털들. 죽고 한참이 지난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려고 집은 순간 그가 상자를 들고 나왔다.
“마음에 드는 거 있어? 몇 개 줄까?”
생긋 웃으며 그는 한번 인화할 때 두 장 정도 여유분을 만들어 둔다고 덧붙였다. 잊어버리거나 혹시라도 선물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라 했는데, 철저하다 못해 지레 걱정하는 성격이 딱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젓고 턱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갈색 골판지로 된 그것의 뚜껑을 열자 책상의 그것과 비슷한 사진이 몇 장 있었다.
“보고 너무 놀라지 마.”
그는 좋아하는 과자를 찾으러 뒤적이는 아이처럼 사진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꺼냈다. 폴라로이드처럼 흰 테두리 안에는 이전처럼 죽은, 그보다 훨씬 선명하고 붉은 것들이 보였다. 피와 먼지가 떡처럼 뭉친 털 뭉치와 곧게 뻗은 네 다리, 검고 흰 무늬를 따라가니 새빨간 형체가 보였다. 이전과 다르게 플래시를 터트려서 그 색감이 적나라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로 선명했다.
“뭐야, 이거!”
나는 손사래를 치며 뒤돌았는데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아주 순수하게 웃었다. 돌아보니 이미 사진을 넣고서 상자를 닫고 있었다.
“놀라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 많이 놀랐지.”
이런 모습을 보려고 모아둔 사진이라면 꽤나 짓궂은 사람이라며 치, 들리도록 티를 냈다. 그에 당황했는지 뒤에서 끌어안아주고는 죽은 녀석들이 불쌍했다며 자신에게 ‘수상한 취미’ 따위는 없다고 속삭였다. 그 수상한 취미가 죽은 동물들을 찍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면 귀찮아질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작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으로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어차피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니었으며 솔직한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할 따름이었다. 맛있는 술과 발끝을 지나는 시원한 바람, 야심한 새벽에 등을 데워주는 그의 체온과 부드러운 손. 은은한 조명과 투명한 꽃병에 비친 우리 모습은 유명한 어느 추상화가가 그린 장면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랗게 늘어진 몸이 하나가 되어 부드럽게 춤추는 지금을 바라보고 있었다. 취미 같은 것들을 따지고 들며 사람을 간 보는 것보다 지금을 느끼겠다고, 이상한 걱정에 매여있을 여유는 없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