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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Sep 30. 2022

함소화

 가을과 어울리지 않을 법한 달콤한 향기였다. 얼핏 멜론맛 아이스크림에 비해 꽃잎은 목련처럼 도톰한 데다가 노르스름한, 나른한 오후를 닮은 꽃이었다. 코를 더 가까이하자 알코올처럼 휘발되는 느낌에 머리가 살짝 아플 정도로 달큼했다. 함소화라고 했다. 넓지 않은 투룸 한편에 제법 많은 화분을 기르는 그녀는 사철 내내 꽃이 피어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식물이든 픽픽 죽여버리는 나와는 정반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에 어울리는 꽃이지, 화려하고 달콤하고 순식간에 잊히고.”

 좋아하지만 지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말하며 그녀는 휭 돌아서서 주방으로 향했다. 햇빛이 들이치는 창가에서 나는 쪼그리고 앉아 그녀와 화분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찻잔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도 없을 가을과 오후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서있었다. 요즘 서원해진 그녀의 모습이 싫었지만 차마 말을 하진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는 꽃을 꺾듯 차가워질 것만 같았다.

 “커피?”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지만 창가의 열기가 따사로움을 넘어 따가워진 탓에 나는 주방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갔다. 사실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우리의 관계는 한 여름의 뜨겁고 생생한 것이라기엔 미적지근했기 때문이다. 아마 가을에 가깝겠다.

 시작은 어느 여름,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우리는 처음 만났다. 전 애인의 친구가 소개해준 사람과의 술자리였다. 서로 바라는 바가 명확해서 금방 피상적이고 말초적이며 성긴 관계에 접어들었던 우리는 그 이상으로 진행하진 않았다. 몸 그 자체가 서로에게 충분했다고, 그래서 먼저 꺼내기라도 하면 우리는 겨울로 접어들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조금 극적인 이전의 연애 같은 것들은 누구에게나 들키기 싫은 법이니까.

 캐모마일 향이 하얀 선을 따라 퍼지고 있었다. 진하지만 가볍고 쉽게 날리는, 함소화는 몇 걸음만에 잊혔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는 돌아서서 찻잔을 건넸다. 그리고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손잡이에 걸린 티백이 흔들거리며 찻물을 우려낼 뿐이었다.


 호록, 한 모금을 마시는데 그녀는 찻잔만 바라봤다. 연둣빛이 도는 노란 찻물과 티백과 그 안에서 뭔가 찾는 듯 진중한 표정에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컵과 입술부터 온 몸으로 퍼지는 온기에 잔잔한 향기와 점점 탁해지는 적막. 바깥에서 트럭이 지나는 소리와 위층에서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움직이는 것들의 소리는 다행히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낮게 떨리는 냉장고가 멈춘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난 주가 동생 기일이었어.”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보듬어주듯 양손으로 꼭 쥔 찻잔 안에 있었다. 자신과 관련된 것 이외의 말은 거의 하지 않던 우리 사이였기에 온갖 질문이 싹텄다.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지만 언제, 어째서 그것을 내게 말하며 분위기를 잡는지! 동시에 내게는 잘못이 없다는, 불순하고도 달콤하고 스치듯 숨어있는 안도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애써 힘들겠다며 슬픈 표정을 짓고 손을 뻗었다. 그녀와 닿아서 우리는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가볍고 흔들리는 내 손끝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과 매끈한 손톱이 필요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가만히 말을 이어갔다.

 “5년도 더 된 일이야. 어느 날에 무섭다고 연락한 적이 있었어. 금요일이었나 토요일이었나, 새벽이었는데 사방이 시끄러운 곳에서 누군가가 잡아채듯 금방 통화도 끊겼지. 다시 걸어봤는데 그 사이에 전화는 꺼져 있고. 나도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무슨 상황인지도 몰라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지.”

 손이 닿기 직전에 그녀는 움츠리며 내 손길을 피했다. 한 마리 뱀을 보는 듯한 눈빛에 나는 괜스레 차를 크게 들이켰다. 벌써 미지근한 데다가 너무 오랫동안 우러났는지 혀가 얼얼할 정도로 쓴맛이 났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다행히 다음 날에 연락이 되긴 했어. 별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에 한번 보자고 했지. 내가 한창 일이 바빴거든. 서른이 넘어가고 독립하면 가족이라 하더라도 모든 일 제치고 찾아가기가 그렇잖아, 죽을 일이 아니면. 괜찮다며 끙끙거리는데 무슨 일이냐고 쳐들어가서 캐물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데 그게 희수가 죽기 직전이었던 거야. 이미 스스로 떠나겠다고 결심을 한 뒤였겠지.”

 천천히 일어나는 그녀를 바라보는데 현기증이 핑 돌았다. 그리고 힘이 빠졌다. 손과 발에서부터 저릿한 감각이 순식간에 퍼져 올라왔다. 그녀는 식탁 모서리를 스치듯 걸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거의 다 정리되고 나서야 걔가 꽁꽁 숨겨둔 일기를 찾아볼 수 있었어. 여러 날들에 거쳐서 복잡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지. 본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힘든 것들이 많아서 다 믿지는 않았어. 그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라면 오른쪽 팔에 흉터와 목에 있는 문신, 전화번호와 날짜들. 그리고… 네 이름이겠지.”

 희수,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과 몇 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5년 전이라고 했나, 벌써 그렇게 지났나. 가끔 술을 마셨고 자주 싸웠고 응급실에 간 적도 있는데, 별일이었나? 걔는 괜찮다고 했는데. 머리가 지끈거리며 소리들이 멀어지니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찔한 함소화 향기를 끝으로, 뭔가를 말하는 듯한 그녀가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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