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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Nov 04. 2022

떨어진 것

 꽃병에 물을 새로 받고 줄기 끝을 살짝 자르던 참이었다. 가위질의 진동만으로 국화 꽃잎이 후두둑 싱크대 안으로 쏟아졌다. 끈적하고 거무스름한 꽃 안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래전에 죽은 것이 상한 것처럼, 찌릿한 냄새가 천천히 올라왔다. 꽃잎들 끝에도 검고 끈끈한 것이 묻어 있었다. 이미 상한 지 한참 지난 것이었다. 겉모습으로는 싱싱하다 못해 가끔 향기도 났던 것인데 언제부터 죽었던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물기에 닿아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꽃잎들을 하나씩 떼어 모았다. 다 떨어져 버렸으니 꽃병에 꽂아둘 이유가 없었다. 보기 흉할 정도로 끈적이는 꽃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깨끗한 줄 알았던 꽃병도 자세히 보니 뭔가 끼어 있었다. 미끈한 촉감과 비릿한 냄새. 꽃을 받고 일주일이 훌쩍 지났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며 그녀가 건네준 것이었다.




 “우리 어른스럽게 헤어지자. 그게 서로에게 좋잖니.”

 만나기 전부터 전화로 헤어질 날을 정해놓았다는 그녀는 진한 청바지에 와인색 맨투맨 차림이었다. 작은 가방이 걸쳐진 어깨, 그 끝 손에는 하얀 국화가 몇 송이 있었다. 투명한 비닐과 노란 끈으로 장식이 되었으며 국화라기엔 동글동글했다.

 “퐁퐁 국화래. 귀엽지 않아?”

 헤어지는 게 기분 좋은 일인 것 마냥 웃는 그녀였다. 그렇네, 낮게 대답했으나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에 묻혔는지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를 놀리려고 이상할 정도로 웃으며 들뜬 것처럼 보였다. 유치한 것이니 어른스러운 것이니 따지던 그녀였기에 헤어지는 날조차 혼자 정했다. 그럼에도 도대체 예의 따윈 없다는 듯이 구는 것이었다. 이미 타인이라 정했기에 무례해도 된다는 것인가? 꽃을 받고 화를 삭이려 기나긴 몇 초를 지내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렸다. 관자놀이와 턱에서 콩닥거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고 꽃다발 비닐이 으스러질 듯 쥐어지며 가는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였다.

 “나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기로 했어.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안아줄 수 있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당장 꺼지라고 말했다. 별 미련 없이 뒤돌아 걷는 그녀를 한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고 우리 사이에 있던 친구, K에게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왜 이제야 연락하냐며 오히려 다그치던 K는 ‘훨씬 어른스럽고 제법 적당한 직장도 있는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분명 자신이 내 존재를 앎에도 남자 친구라며 소개를 해주었다며 ‘너보다 변변치 않은데 뭣 때문에 사람이랑 결혼하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딱 보니까 한참 전부터 널 갖고 논 거였다니까. 오랫동안 지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여우가 따로 없는 거 있지! 그러면서도 어디에서 얼마나 벌고 하는 이야기 하더라고. 속물도 그런 속물이 없더라니까.”

 거친 말을 조금씩 섞어가며 말을 잇는 K에게 나는 고맙다며, 잠깐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년이 나쁜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고. 혹시 술 마시고 싶으면 늦게라도 연락해, 알았지?”    

 

 처음에는 마땅히 꽃병이라 할 것이 없었다. 그나마 깊이가 있는 맥주잔(그것도 어느 사은품으로 받아서 아예 쓰지 않는 녀석)에 꽂아두었는데 모양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꽃을 위해서 꽃병을 따로 산다고 하자 또 다른 친구 P는 ‘기어이 미쳤다’며 혀를 찼다. 보는 앞에서 바닥에 버리고 발로 짓밟아도 모자랄 판에 그걸 꽃병에 꽂아서 며칠째 보는 것은 미련을 넘어서 나에게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그런 소릴 듣고도 마음이 남아있는 거야?”

 나는 절대 그렇지 않으며 원래부터 꽃을 좋아했다고, 연애할 적에 내가 꽃을 자주 선물하던 것을 모르냐고 반문했다. P는 ‘혹시라도 미련 때문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하면서 그제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뒀다. 헤어져서 미친놈 취급받기는 싫었으므로 나는 아직도 생각이 난다는 말을 삼켜야 했다.

 결국 단출하기 그지없는 꽃병을 하나 샀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맥주잔에 새겨진 로고가 굉장히 거슬린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냥 꽃이 예뻤기 때문이다. 아크릴인지 플라스틱인지 생각보다 가벼운 그것은 반듯하게 떨어지는 원통이었다. 보송보송해 보였지만 나름 단단한 꽃잎에 진한 줄기가 반투명한 몸체에 번져 보였다. 삭막하던 책상에 잘 어울리기도 했다.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스탠드 옆, 책장 앞에 서 있는 그 꽃을 보며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사실 거짓말이었다. 벚꽃이 막 떨어지는 봄부터 만나서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지낸 시간을 돌이켜보기도 했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으므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관계의 밀도는, 함께한 시간의 농도는 적어도 가볍지 않을 것이었다. 가깝진 않아도 걷기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리는 시간이 나면 함께 걸었다. 기분이 좋은 날이면 중간에서 만나 맥주를 마셨고 서로의 집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면 말끔한 공원으로 이어졌다. 늦봄을 지나 여름이면 더위를 피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우리도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분명,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비릿한 냄새가 조금씩 나기 시작한 것은 나흘이 채 되기 전이었다. 고인 물이 상한 듯한 냄새였기에 꽃 자체보다는 탁해진 물이 문제였다. 밤이면 그 냄새가 진해졌는데, 한창 가을에 그녀가 이별을 정했으며 벌써 밤이면 조금 추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시간이 나면 물을 꼭 갈아줘야 했다. 이때 줄기 끝을 조금 잘라주었는데 이러면 꽃이 오래 피어있다는 말을 어디서 봤던 것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 길이가 짧아지더니 엊그제엔 꽃병만 해졌다.

 꽃은 향기를 점점 잃어가면서 그녀보다 그녀가 떠나간 이유를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부모님의 지원과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글을 쓴답시고 끄적이는 것이 문제였을까? 분명 변변찮은 직업을 운운했으니 그럴 수 있었다. 비록 계약직이었으나 나보다는 경제적으로 독립된 그녀였으니. 결혼 나이를 꺼냈던 것은 임신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부터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K의 말은 불쾌했으나 물증이 없었다. 그마저도 지금 와서 화를 내기에 나는 ‘나보다 번듯한 직장에 안정적인 그녀의 남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만한 성질머리도 없으니 괜한 객기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제에는 그녀와 유독 친했던 L에게 연락이 왔다.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무엇에 놀란 것인지 횡설수설하던 L은 이내 전화를 끊고 카톡으로 링크를 보내 주었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뉴스였다. 너무 잦아서 매일 뜨지도 않는 것이라 여기던 찰나에 K에게도 연락이 왔다.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어떻...”

 K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일단 알려준다는 투로 말하면서도 내가 괜찮은지 살피는 눈치였다. 우선 알겠다며, 나는 K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저녁으로 먹은 빵 몇 조각과 샐러드가 턱턱 막혔다. 링크를 따라가서 기사를 다시 열었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다가 큰 화물트럭과 들이받았는데 운전자는 중상이었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여성은 사망. 남편 될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몇 시간 전 기사였으며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타인에 불과했다. 어떠한 관련도 없는 타인일 뿐이었다.

 다음날 K는 내게 어찌할 것이냐 물었다.

 “잘 모르겠네. 그래도 안 가는 것보다는 가는 게 좋겠지. 가야 하지 않겠어.”

 K는 친절하게도 무리하지 말라며, 그동안 시간만 생각하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해줬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다. 오늘따라 상한 냄새가 심해진 꽃을 보다가 물을 왈칵 비웠다. 가냘프게 붙어있던 잎사귀들은 이미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 한 뼘이 겨우 되는 줄기를 가위로 툭툭 잘라댔다. 수수깡 잘리듯 텅 빈 줄기가 잘게 끊어졌으며 진동을 타고 꽃잎들이 싱크대에 쏟아졌다. 오래전에 죽은 꽃은 지독하게 상한 상태였다. 받을 때부터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꽃잎 아래에 거무스름한 몸이 붙어있는 줄은 몰랐다. 노랗다 못해 갈색으로 바삭해진 꽃잎은 떨어지며 가는 소리를 냈는데 낙엽처럼 보였다.


 떠난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결정하고 통보하며 뒤돌아서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그러나 내가 한 번이라도 잡았다면, 꽃을 받지 않았다면.


 이미 꽃이라 하기에는 흉물스러운 그것을 바라봤다. 지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정리할 것은 산더미였는데 물기를 머금어서 찰싹 달라붙은 것들이 싱크대에 가득했다. 더 이상 물에 닿아도 살 수 없으니 이미 죽은 것들이었다. 모두 떨어져 한결 가벼워진 줄기와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꽃병을 한쪽에 밀어냈다. 물을 트니 흰 거품 이는 물결을 따라 꽃잎들이 하수구로 쏟아져 들어가고 촘촘한 망, 가장 낮은 곳에 모조리 쌓였다. 새하얗던 꽃잎들은 얼룩지고 눅눅해져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꽃잎이라 부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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