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후 Jun 27. 2022

신원확인

 팔 한쪽만이 그의 시계와 반지를 이끌고 나에게 찾아왔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냐하면 절대 그 사람일 리가 없었으니까. 내게 이런 짓을 할 리가 만무하니까.


 오월이 시작할 즈음, 우리는 이별했다. 그리고 어제서야 3년 동안 그와 함께 했던 우리의 집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남은 문제는 집안 살림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 식기는 절반씩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구매하는 데에 든 비용 상관없이 사용했던 기억은 동일하다고 그는 변명했다. 그는 내가 쓰던 머그잔을 챙겼다. 어쩔 수 없던 나는 그의 주황색 머그잔을 상자에 담아야 했다. , 분리되기 힘든 재산에 관해서는 선물로 받은 것만 챙기기로 결정하였다. 판단이 명확하지 않으니 우리 사이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나는 그에게 받은 검은 브래지어를 상자에 넣으며, 어떤 사람의 주장도 이 상황에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사줬던 시계를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동거를 시작한 해에 선물했던 비싼 시계인데, 젠장. 그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잠시 후에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만은 돌려줘,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 사전과 소설, 그리고 시집에게는 ‘좋아, 당신이 원하는 건 맘대로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는 결별을 선언했다. 영원하지 않지만 지속되는. 그는 상자들 사이에서 나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이미 서로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으로 끝났는데. 나는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줄 수 없었다. 이름 모를 감정을 내비칠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는 정리되지 않은 상자를 뒤적였다. 들쑤셔진 나와 그의 물건들이 엉망진창 뒤섞였다.


 새로이 이사할 집은 3층에 위치한 원룸이었다. 우편함에는 이 전 세입자의 흔적과 먼지가 버무려져 있었다. 짐을 옮겨주겠다며 함께 온 그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무 말없이 수북한 우편물을 밑에 호수로 꾸겨 넣었다. 이내 서로 모른 척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 할까 복잡한 마음에 가벼운 짐들을 조용히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오후 4시 즈음, 그는 조용히 떠나갔다. 해외로 나가서 얼마간 혹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은 그렇게 떠나갔다. 나는 홀로 상자들을 풀기 시작했다.

 그가 이미 책상과 매트리스를 구석에 맞추어 정리해두고 갔다. 고전 전집과 손 때 묻은 사전들이 책장을 채운다. 과거 달력들과 일기들은 하나도 없다. 아쉬웠지만 다시 가져올 수 없는 노릇, 그것만 가져간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이불을 침대에 맞추어 펴고, 텅 비어 멍든 상자들을 정리하였다. 나의 집이 된 것이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8시, 대강 정리된 통들을 밀어 놓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묵은 김치와 장아찌들 사이로 도시락통이 하나 있었다. 그의 성격에 모르고 놔두었을 리는 없었다. 열어보니 닭강정 조금과 김치에 무말랭이 무침이 들어있었다.


 맛있는 밥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그는 누누이 말해왔다. 크게 한 판 싸우고 나면 그는 늘 손수 정갈한 밥을 지어 저녁을 차려주었다. 매번 늦은 오후에나 다툼은 마무리되었는데, 산책이나 다녀오라며 저녁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해가 떨어져 가는 저녁시간이 되면 집 근처의 공원은 조용해졌다. 급히 저녁거리를 사 들어가는 아주머니와 오픈 준비를 하는 술집들을 구경하며 30분 정도 걸리는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면, 현관에서부터 잘 된 밥 냄새가 풍겼다. 그때의 반찬들도 하나같이 남은 치킨을 데운 것과 묵은 김치, 그의 부모님이 보내주신 장아찌 한 두 가지와 진한 된장국 정도였다. 가끔 고추장 양념에 볶은 순대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게 그와 나는 덤덤히 마주 앉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치킨과 달착지근하면서 쌉싸름한 장아찌로 한 그릇을 해치우고 나면 된장국에 밥을 말아 또 한 그릇. 여러모로 허기졌던 나는 평소의 두 배나 먹어 치웠다.

 그는 내가 없더라도 혼자 밥을 해 먹을까 했다. 괜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저녁을 준비했다. 작은 걸상에 수저 젓가락을 놓고는 그가 남긴 밥과 마주했다. 분명 충분히 데웠는데 밥알이 툭 떨어졌다. 김치는 벌써 맛이 가버렸는지 약간 군내가 나기 시작했고, 장아찌는 너무 달았다. 그렇게 결별이 마무리되어갔다.


 그렇게 끝이 났다면.


 그의 어머님에게 연락이 온 것은 자정이 다 되어가는 밤이었다. 공항과 뉴스, 사고, 확인을 위해. 찰기 없이 툭툭 떨어지는 말이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저희 헤어졌어요, 말하지 못했다. 머리로 고민하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나는 이미 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