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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읽으려면 종교를 알아야 한다

종교의 용광로, 한국

by 김희우

한반도는 여러 문명이 교차하며 새로운 질서를 끊임없이 모색해온 땅이다. 이 땅에서 서로 다른 사상과 종교는 한순간에 단절되기보다는, 때로는 날카롭게 부딪히고 때로는 유연하게 스며들며 통합과 변용을 거듭했다. 예컨대 불교가 왕실의 이념으로 자리 잡은 신라·고려 시기에는 동아시아 불교 문화의 정점을 이뤘고, 조선 건국과 함께 국가 전반을 재편한 유교(성리학)는 개인의 윤리에서 국가 의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변혁을 일으켰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가 먼저 들어와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고, 이후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면서 서양 문물이 대거 유입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다양한 ‘신종교’가 발흥해 민족주의와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렇듯 한반도는 뿌리 깊은 전통과 낯선 흐름이 서로 충돌하면서도 어우러지는 ‘거대한 용광로’로서, 동서양의 문화가 뒤섞여 전혀 다른 방식의 조화를 끊임없이 탄생시켜 왔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종교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다. 초기 개신교는 당대 사회에서 소수자 지위를 가졌음에도 태극기를 들고 황제를 위해 기도하는 진취적 민족의식과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있다”는 집단적 각성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그러나 국가 재건이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급격히 세를 확장해 제도권 안에 자리 잡자, 점차 해방성과 민중성이 퇴색하고 현실 권력 구조와 손잡으려는 타협이 더 자주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열망을 온몸으로 담았던 태극기가 해방 후 특정 정치 세력에 의해 도구화되었듯이, 종교적 상징 역시 언제든 권력의 이익에 맞추어 왜곡될 수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독교만의 예외적 사례로만 볼 수는 없다. 오랜 세월 한반도에서 유교·불교·기독교·샤머니즘은 권력과 결탁하거나 때론 길항하며, 끊임없는 변주와 통합을 거듭해왔다. 현실적 도전에 맞닥뜨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전통과 외부 사상의 접점을 새롭게 모색했으며, 그 충돌과 접합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새 질서를 끊임없이 만들어낸 셈이다. 바로 이러한 복합적 역동성이야말로 한반도의 질긴 에너지이자, 앞으로도 한국인이 이어갈 진화의 과정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종교적 세계관과 경험이 한데 섞여 나타나는 현상을 종교학에서는 신크레티즘(syncretism)이라 부른다. 종교는 언제나 "원형 그대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기존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흡수하고 재해석하며 변화해왔다. 이러한 혼합과 변형의 흐름은 특정한 시대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국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신크레티즘을 경험해 온 사회로 이 개념이 낯설지 않다.



소수 집단이었던 기독교가 제도권의 한 축으로 부상하며 보수화되고, 불교가 수도생활과 기복신앙을 동시에 품고 있는가 하면, 거대한 통합담론을 펼쳤던 민족주의가 여전히 현실 정치에서 소모적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근원적 신성이나 순수한 이상주의가 마냥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현실적 좌절과 고통, 그리고 높은 성취동기나 이상주의 사이를 오갈 때마다 한국인은 “벽을 넘어서는 힘”을 종교로부터 끌어오곤 한다.



지금도 문화 지체나 사회 갈등이 적지 않고, 때론 높은 이상주의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그 혼란과 충돌이야말로 한국인이 다층적 배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온 비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최소한 극단적 파멸로 치닫지 않고 매번 묘한 타협과 융합을 반복해 온 동력이 바로 이중적 기질의 긍정적 측면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혼란과 모순이 뒤엉킨 환경 속에서 한국인의 역사를 돌아보면, 다채로운 종교와 사상이 빠르고 복합적으로 융합·충돌해 왔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지며, 이는 곧 한국 특유의 유연성과 역동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아가 최근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영적 감각을 유지하는 역설적인 모습은 어쩌면 한국적 정체성의 또 다른 면모일지도 모른다. 무종교인이 증가하는 추세라 해도, 그들이 또 다른 형태의 샤먼적 세계관을 품거나 보이지 않는 차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엿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신크레티즘(syncretism)을 통해 이룩해 온 자기갱신의 과정과 끊임없는 재창조가 빚어낸 복합적 에너지가, 한국 사회가 지닌 가장 독특한 감각이자 미래를 열어갈 잠재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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