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더 불행해질까?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인간의 행복을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는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 오늘날 과학은 “행복이라는 감정이 생존과 번영을 이끌어 온 동력”임을 강조하며, 인간이 본능적으로 쾌(快)를 찾아 발전해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실제로 많은 현대인은 충만한 행복을 갈망하면서도 물질적 욕구와 내면적 의미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이는 생존을 넘어 더 깊은 의미와 연결을 함께 추구하는 인간의 복합적 본성에서 비롯된다.
이 가운데 ‘사람을 통해 얻는 자극’은 가장 빠르게 행복 스위치를 켜는 강력한 요인이 된다. 인정받고 소속감을 느끼며 통하는 사람과 교감할 때, 복잡한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즉각적 기쁨이 찾아온다. 반면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일상의 많은 영역을 뒤흔들 정도로 큰 불행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종교 전통은 이러한 ‘관계’가 지닌 의미를 일찍부터 주목해 왔다. 유교는 개인의 행복보다 타인과의 조화, 가족·공동체의 안녕을 우선했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그와 같은 둘째 계명으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통해 이웃 사랑을 핵심 가치로 삼았다. 불교 역시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를 통해, 함께하는 삶이 왜 궁극적 가치인지를 강조해 왔다. 이처럼 많은 종교 전통은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 서로 기대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 왔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영적 체험과 깊은 평온·기쁨을 중시해 왔다.
이 중에서도 ‘사랑’이 지닌 특별함은 ‘주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에 있다. 내가 상대에게 무언가를 줄 때, 그것은 분명 타인에게 건네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우리’라는 새로운 주체가 함께 누리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 곧 주고받는 과정에서 나 역시 그 기쁨을 되돌려받는 것이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자신과의 관계’이다. 함께하는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모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내’가 상대와 함께 누리는 기쁨이라면, ‘내’가 건강하고 안정된 상태라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돌보는 일은 결국 내가 주는 행복을 더 풍요롭게 돌려받게 만드는 기반이 된다.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새로운 자극과 사회적 연결, 그리고 자기 이해가 결합될 때 뇌의 보상 체계가 활성화되어 행복감이 증폭된다. 일상에서도 사소한 순간마다 “지금 내 내면은 어떤 상태인가?”를 살펴보고, 신뢰하는 이와 대화하며, 예상치 못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행복을 깊고 오래 지속시킨다.
예컨대 늦은 밤 야근을 마치고 돌아와 가족과 나누는 사소한 대화가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될 수 있고, SNS에서 지인들과 따뜻한 격려를 주고받는 일이 커다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종교 전통은 이러한 작은 행복들을 단순한 개인적 만족으로만 보지 않고, 더 큰 사랑과 자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일깨우도록 이끌어 왔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틀에 자신을 맞출 필요는 없지만, 때로는 개별적 기쁨이 공동체적 가치로 이어질 때 우리 스스로 누리는 행복도 확장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라는 말이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일상의 작고 사소한 기쁨들을 자주 마주하고 누리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핵심 동력이 된다. 타인과의 연대와 자기 돌봄이 함께 어우러질 때, 그 소소한 기쁨들은 서로를 풍요롭게 북돋우며 점차 더 큰 의미와 안정감으로 확장된다. 그렇게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고 스스로를 충만하게 가꿔 나가는 과정이 쌓일수록, 우리는 어떤 시대적 혼란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깊고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