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차별 - 반지성주의의 연료
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열정적으로 궁금해할 뿐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 이마누엘 칸트
우리는 ‘내 생각’을 가진 듯 보이나, 실제로는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나 선동적 메시지에 의존해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쉽게 소비되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진실’이라 믿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질문 없이 흘러가는 삶에서는 권력을 쥔 소수의 목소리가 대중을 훨씬 수월하게 움직인다. 왜냐하면 비판적 지성이 부재한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바로 ‘감정적 분노’와 ‘편가르기’이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을 ‘공동의 적’으로 규정하고, 편을 갈라 적대감을 유도하면 사람들은 비판적 숙고 없이 그 대립 구도에 빠져들기 쉽다.
종교·정치·언론·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반지성주의 현상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한다. 반지성주의는 문자 그대로 지성을 무시하고, 합리적 분석보다는 즉각적인 이득과 감정적 반응을 우선시한다. 겉으로는 높은 도덕이나 신앙을 외치면서도, 실은 배타적 언어와 혐오의 서사를 조장해 신도나 대중을 결집시키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본다. 사회 전체가 무감각해진 채, 혐오와 거짓을 밑거름 삼아 누군가의 권력과 물질적 이득을 키우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우려했던 ‘악의 평범성’에 더욱 가까워질 뿐이다. 악은 거창한 폭군이나 독재자가 만들어내는 특별한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생각하기를 멈춘” 수많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공모의 결과물이다. 부정확한 주장이나 선동적 구호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근거 없는 낙인찍기에 가담하는 무관심이 끔찍한 비극을 낳는다. 그 비극은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차별의 형태로, 때로는 전체주의의 발아로 드러난다.
의문과 질문의 빈곤이 지속되면, 독재나 전체주의는 제 발로 찾아오기 전에 이미 내부에서 준비가 끝난것이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적 사고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왜?”라고 물을 필요가 있다. 권위 앞에서 쉽사리 고개 숙이지 말고, 내 주변에 만연한 차별적 태도와 배타적 규범에 대해 본질을 파고들어야 한다. 질문은 갈등을 일으키는 불편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지금 우리 앞의 부조리를 바꾸는 첫 걸음이 된다.
사회 전반에 퍼진 혐오와 차별의 문법을 깨기 위해서도 이러한 태도가 필수적이다. 혐오의 언어가 난무할 때 이를 방관하는 무관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범이 되는 길이다. 반대로 질문하는 사람은 쉽게 동조하지 않는다.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논리를 끊임없이 파헤치고, 편견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분석함으로써 사회적 통념에 균열을 낸다.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개인의 작은 질문이 더 나은 제도와 문화적 변화를 촉진한다는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질문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삶이 가진 다층적 의미를 되새기며, 동시에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내면의 자유를 획득한다. 이 자유야말로 반지성주의의 공세를 거부하는 최고의 방어다.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줄 외부의 도식이나 혐오 담론이 필요 없기 때문에, 선동에 휩쓸리지 않을 힘이 생긴다. 시민 개개인이 이런 면역체계를 갖출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유토피아가 성취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디스토피아로 치닫지 않을 방법이 열리는 것이다.
결국 질문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이 아닌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 삶에는 끊임없는 사유의 도전과 실천적 용기가 동반된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질문을 품을 수 있고, 그 질문을 통해 세상에 조용하지만 깊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질문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것이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키고 미래를 여는 가장 강력한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