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일이 가능하려면 화물차 중에서도 수납공간이 많은 하이탑 차여야 했는데 그런 차는 중고차 매물이 정말 귀했다.
새 차는 부품 공급 차질 때문에 돈은 둘째 치고, 주문하면 기본 4개월 이상은 기다려야 출고되는 상황이었다. 중고차를 구하기 위해 엔카, K 카, 차차차 플랫폼을 뒤지다 내가 원하는 조건의 새하얀 화물차 한 대가 매물로 올라와 있는 걸 봤을 때 그 반가운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택배차는 대표적으로 현대 포터2, 기아 봉고3가 있다.
두 트럭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똑같은 차 아냐?’ 할 정도로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다.
포터2는 부드러운 주행과 승차감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 같았고,
봉고3는 무거운 걸 잘 실을 수 있는 튼튼한 차를 원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에 생수 배달로 일을 시작했기에, 승차감을 포기하고 더 단단한 느낌이 있는 봉고3를 선택했다.
내가 본 흰둥이의 스펙은 이랬다.
봉고3 익스(하이)내장탑* 1톤 킹캡* CRDI / 초장축* / 2498cc·133마력
14년 05월식/ 19만 킬로/ 디젤 / 자동 변속기 / 무사고차 /1인신조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기어가 자동 변속기냐 수동 변속기냐였다.
내 면허는 2종 보통이어서 수동 변속기의 차량을 몰 수 없었기도 하고, 수동은 불편해서 1종 면허인 사람들도 자동 변속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컸다.
가격차이가 100만 원 이상 나는데도 그랬다.
“뭐 2종 보통? 여자냐?”
친구들이 놀리는 소리가 벌써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요즘엔 어떨지 모르지만 90년대 초반 생인 내가 면허를 따던 20살 무렵만 하더라도 면허의 실제 쓰임새와 관계없이 남자는 무조건 1종을 따야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러다 보니 2종 보통면허를 갖고 있다고 하면 남자가 무슨 2종이냐고 놀리는 친구들이 아직도 있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이런 놀림이라니.
2종 보통 면허를 가진 남성들이여, 당당해지자. 우리는 트럭도 끌 수 있다.
간혹 큰 차를 몰려면 무조건 1종 면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어지간히 큰 차도 2종 면허로 다 끌 수 있다. 면허를 딸 때도 그 점을 알았기에 굳이 1종을 따지 않았었다.
다행히 흰둥이는 자동 변속기를 가진 차여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다른 조건에 있어서는 썩 좋은 차는 아니었다.
2014년도에 생산되어 주행한 거리가 곧 20만 킬로를 넘어가는 오래된 차였기 때문이다.
주행거리 20만 킬로미터는 우리나라 중고차 시장에서 어떤 마지노선으로 여겨진다.
20만 이상 킬로 수의 차라면 엔진오일과 미션오일에 누유가 생긴다든지 DPF나 인젝터 쪽에 성능이 많이 저하된다든지 하체 부품 쪽에서 소리가 난다든지, 아니면 실내 사용감이 많아서 대대적 복원이 필요하던지 무슨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있다.
연식에 있어서도 2014년형이면 오래된 차였다.
나는 오히려 주행거리보다 연식을 따지는 편이다.
우리나라 대표 수출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엔 최고의 연구진이 동원될 테고,
해를 거듭해 출시되는 새로운 모델들은 당연히 기존의 문제점을 개선한 더 좋은 차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에게 2014년도 봉고3는 모험이었다.
차라리 2018년도 이후에 출시되고 주행거리가 30만 킬로인 차였다면 그 차를 선택했을 것이다.
연식이 짧지만 킬로수가 높다는 것은 고속주행이 잦을 확률이 높고 그러므로 엔진 쪽 상태가 비교적 좋을 순 있다.
하지만 역시 주행거리가 높으면 나중에 다시 팔기가 애매해진다는 단점은 있다.
아무튼 흰둥이는 주행거리도 높고 연식도 오래된 악조건을 가진 차였다.
구매를 결정하기 전에 딜러의 판매 이력과 차의 성능점검표, 보험 이력을 최대한 꼼꼼히 확인했다.
딜러가 전손차(수리비가 찻값보다 더 나온 큰 사고 차량)나 침수차를 판 이력이 있는지를 보았다.
아무래도 훼손이 심한 차를 구입하거나 판 경력이 있는 딜러는 양심적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또한 어딘지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소문이 너무 안 좋은 수도권과 경기도 특정 지역들의 딜러들도 피했다.
주변에서 중고차 사기를 당한 이야기를 들어봐도 대부분이 그 지역의 딜러들이었다.
나는 그 딜러들을 이길만한 에너지가 없었기에, 너무 소문이 안 좋은 그쪽은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1인 신조(최초 구매자가 중고로 판매하기까지 혼자 운행한 차량)가 아닐지라도 소유자 변경 횟수가 많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주인이 많이 바뀐 차는 겉은 멀쩡해 보여도 무언가 만성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험 이력 상에 주요 골격, 프레임을 교환한 사고 이력이 있는지, 보험 미가입 기간이 얼마나 긴지(보험에 가입되지 않을 경우 수리를 했어도 보험 이력 상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도 확인했다.
만약 사고가 있었던 차라면 사고 발생 시점과 중고차 시장에 매물로 나온 시점 사이가 너무 짧진 않은지도 확인해야 했다.
사고가 발생하고 얼마 안 있어 중고 판매하는 차는 그 사고로 인해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흰둥이는 항상 보험도 가입되어 있었고, 무사고여서 다행이었다.
딜러와 차의 서류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직접 차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상태였다.
시동을 걸고 떨림이 심하진 않은지 확인하고 5분 이상 예열을 한 뒤 시동을 끄고 엔진오일 캡을 열어 연기가 나는지 확인했다.
연기가 나오지 않거나 나오더라도 아주 적은 양의 흰 연기가 나오면 합격이다.
푸른 연기가 나거나 오일이 많이 튀면 엔진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에, 뒤도 안 돌아보고 다른 차를 골라야 한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끝까지 뽑아보았다.
안전벨트를 끝까지 뽑았을 때 끝부분의 색이 다르면 침수차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까지 확인했지만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성실하고 양심적인 딜러들도 그들이 다루는 모든 차의 소모품 부싱류 등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하나하나 다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딜러에게 딜러가 아는 카센터 말고 기아 정식 대리점 기아 오토큐에 같이 갈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딜러와 알고 지내던 카센터의 경우 문제가 있는데도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차에 자부심도 있고 양심 있는 딜러라 선뜻 허락해 주었다.
검사 결과 미션오일, 서스펜션 부품, 연료필터, 예열 플러그, 엔진·미션 오일 팬, 배터리, 타이밍 벨트, 겉 벨트 세트, 워터펌프, 냉각수 등이 모두 정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새 차 같은 중고차를 사겠다는 도둑놈 심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가격이 싸면 싼 만큼 문제가 있는 게 당연했고, 오히려 완벽하게 수리해 값을 올린 중고차보다 어느 정도 문제가 있지만 가격이 싼 매물이 더 잘 팔리는 게 시장 추세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점을 감안해 어느 정도의 문제는 안고 갈 생각을 했지만, 최소한 크게 사고가 났거나 침수된 적이 있는 차, 혹은 수리비를 들여도 해결되지 않는 만성적 문제를 가진 차를 넘어 최대한 자잘한 추가 비용이 안 들기를 바랐다.
차를 사기 위해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야 했던 그 당시 내게는 자동차 부품 하나하나 가는 것도 아주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자잘하게 고칠 것들은 역시나 있었다.
엔카에서는 타이어를 새것이라 했는데 실제로 보니 마모가 심한 상태였으며, 브레이크 패드와 라이닝을 교체해야 했고 브레이크 오일과 엔진오일을 교환해야 했다.
또 자잘하게는 적재함 보조 발판이 부식되어 용접을 해야 했고, 실내에서 블랙박스는 작동도 되지 않고 SD카드도 없었다.
후방 카메라도 뿌옇게 보여 밤에 운전할 때 위험할 것 같았다.
이것들은 추가로 돈을 들여 새로 설치했다.
그렇게 총 10,300,000원을 들여 온전한 택배 차를 소유하게 되었고, 고생 끝에 생긴 ‘내 차’라는 애착감이 생겨 차에다 ‘흰둥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아래는 흰둥이 스펙에서 어려운 용어와
택배차를 구입하기 전 참고가 되는 용어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 일반캡, 표준캡, 슈퍼캡, 킹캡, 더블캡
일반캡(표준캡)은 운전석 뒤쪽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슈퍼캡(킹캡)은 운전석 뒤쪽에 50~60cm 공간이 있어 시트를 뒤로 누일 수 있습니다.
더블캡은 뒷좌석이 있어 최대 6명까지 탑승할 수 있습니다.
* 초장축
적재함의 길이에 따라 장축과 초장축으로 구분됩니다.
보통 초장축이 더 선호됩니다.
* 종류에 따른 장축과 초장축의 길이 차이
현대 / 기아 (일반캡 = 표준캡, 슈퍼캡 = 킹캡, 더블캡 = 더블캡)
일반캡 / 표준캡 : 장축(적재함 2미터 78센티), 초장축(적재함 3미터 11센티)
슈퍼캡 / 킹캡 : 장축(적재함 2미터 53센티), 초장축(적재함 2미터 86센티)
더블캡 / 더블캡 : 장축(적재함 1미터 86센티), 초장축(적재함 2미터 20센티)
* 하이탑
지면과 맞닿은 타이어 하부에서 자동차의 가장 높은 지붕부까지의 높이가 2.43m 이상을 하이탑이라고 합니다. 정탑(순정)은 2.3~2.43m, 저탑은 1.89~2.14m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