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vs. 엄정수사, 그 사이에서 피해자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별건 수사 하지 말라(“이 부분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다른 혐의까지 파헤치겠다”고 압박하지 말라는 뜻),
8시간 이상 조사하지 말라, 저녁 9시 이후에는 심야 조사하지 말라… 최근 수사기관에는 이렇게 인권 중심의 원칙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무리한 밤샘 조사는 피조사자의 체력을 소진시켜 잘못된 자백이나 부정확한 진술이 나올 가능성을 높인다. 이런 진술로 기소나 재판이 진행되면 사법 정의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수사기관 스스로도 장시간·심야 조사를 지양하고 적절한 시간 안에 조사를 마무리하라는 요구가 커진 것이다. 결국 적법 절차를 지키면서 인권 침해를 최소화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같은 인권 수사 원칙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예컨대 다자간 대질 방식에 대해 “절차상 문제가 있다”며 변호인단을 계속 교체하거나, 1심 법원의 구속 기간(최대 6개월)을 넘기기 위해 재판을 지연시키는 식이다. 사소한 절차나 증거 수집 방식을 꼬투리 삼아 무죄를 주장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데, 그렇게 시간이 끌리다 보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민사는 1년도 안 돼 끝나는데, 형사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더 나아가 2022년부터 검사실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 조서’의 증거능력에도 제한이 생겼다. 과거에는 검사 앞에서 한 진술이 조서에 그대로 담겨 있으면, 법정에서 피고인이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적법한 절차로 작성됐다면 그 조서를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법정에서 피고인이 부인하는 이상, 그 조서를 곧바로 유죄의 결정적 증거로 삼기 어렵게 되었다. 아무리 “피의자가 말을 바꾼 것”이라 하더라도, 법원에서는 새롭게 한 진술을 중심으로 사건을 따져야 한다. 즉, 경찰·검찰 단계에서 했던 진술이 나중에 “그 뜻이 아니었다”고 번복되면, 수사기관은 진술 외에 객관적인 증거를 더 찾아야 한다.
문제는 형사 사건의 상당수가 가해자·피해자 진술에 의존한다는 데 있다. CCTV처럼 명백한 물적 증거가 있으면 좋지만, 대부분은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를 둘러싼 다툼이다. 그런데 진술이 이렇게 뒤집히면, 자백을 바탕으로 증거를 보강해 기소하던 기존 관행이 큰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몇 천억 원대 범죄라도 경찰이 10일, 검찰이 20일 정도만 구속 수사를 할 수 있어, 이 짧은 기간에 모든 증거와 진술을 완벽히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가 점점 더 철저히 가려지면서, 증거능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예를 들어 압수수색 과정에서 영장을 제시하지 않거나, 참여 기회를 보장하지 않은 채 증거물을 확보했다면,
그 증거는 아무리 확실해 보여도 법정에서 사용할 수 없다. 마약 혐의자의 소변 제출을 강제로 요구하거나,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이 부분을 불지 않으면 다른 부분까지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위법한 수사가 이루어지면, 결국 범죄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돼 무죄가 선고될 수 있다.
한 번 형사 소송에 휘말리면 2~3년씩 길어지고, 비용과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고소장을 내러 경찰서를 여러 번 오가고, 대질 조사·검찰·법원 출석 등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 사이 변호인을 선임해야 하거나, 재판 단계별로 변호 전략이 달라져 변호인을 교체하는 일도 생긴다. 잘못하면 거기에 들어가는 돈과 시간이 감당 안 돼, "집 한 채 팔아가며 소송을 치른다”고들 말하는 게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심리적으로, 형사 소송은 단순 갈등보다 훨씬 심각한 정서적 소모를 일으킨다. 조사를 받는 사람뿐 아니라, 피해자조차도 “끝나지 않는 싸움 속에 갇혔다”는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인권 보호가 강화되는 흐름 자체는 분명 가치 있는 변화지만, 그 틈을 타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사람이 늘어나면, 선의의 피해자는 더 큰 법적 공방에 시달린다.
오늘날 “법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한탄하는 목소리는, 역으로 보면 사회가 인권과 절차적 정당성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제대로 된 수사가 힘들어지고, 정작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는 뒤늦은 구제에 만족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이 반복된다.
결국 형사 사건은 가해자 처벌을 넘어, 피해자의 실질적 권리 보호와 공정한 수사 사이를 균형 있게 맞추는 일이 핵심 과제가 된다. “인권 보장”과 “엄정 수사”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제도의 빈틈을 보완하고 수사기관과 법원이 적절한 재량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는 끝없는 재판과 막대한 비용, 그리고 심리적 상처만 떠안은 채 매번 ‘증거 부족’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억울함이 쌓일수록 “누군가가 진실을 밝혀줄 거야”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인권과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제도는 아직 악용 사례까지 완벽히 대비하지 못한다. 피해자가 번복 진술과 복잡한 소송 절차 속에서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나”라며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 제도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흔들린다. 결국 법적 안정성과 피해자 보호를 함께 추구하는 제도 보완이 필수적이고, 증거 수집 단계에서 인권을 보호하면서도 수사의 효율성을 높이는 디지털 증거 확보 기술, 진술 신빙성 검증 시스템 등은 더 발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