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고와 명상, 뇌과학으로 풀어본 내면의 힘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예상치 못한 이별과 직장 내 갈등, 주변과의 비교 탓에 당장 내일부터 어딘가에 숨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말썽을 피우지 않았어도 억압적이고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하는 환경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러던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가까운 정토회에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숨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릴 정도의 고요함과, 정토회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 조용히 마룻바닥에 앉아 있으니 그동안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던 두려움, 자기연민, 분노가 서서히 떠올랐다가 이내 흩어졌고, 그 순간 한줄기 빛처럼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그날 하루는 나를 속속들이 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된 날이었다.
이런 ‘내면의 소리’는 에머슨이 말한 ‘오버소울’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종교적 용어로 설명하면, 인간의 육신을 넘어서는 '영성'과의 연결고리일 수 있다. 불교적 전통에선 본래 청정한 자성(自性)이라 부를 수 있고, 기독교적 맥락에서는 신의 형상(Imago Dei)이 우리 안에 자리한다는 관점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문제는 이 고요하고 보편적인 목소리가 일상의 소음 속에서 너무나 쉽게 잊힌다는 점이다. 현대인은 여러 매체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아가 갈라지고, “원초적 양심”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 채 무기력이나 공허를 경험하기 쉽다.
그렇기에 숙고(熟考)가 필요하다. 숙고는 피상적인 선택지들을 빠르게 고르기보다, 왜 그런 고민이 생겼는지 인과(因果)를 성찰함으로써 더 깊은 지혜를 끌어내려는 태도다. 이는 과학적 관점에서도 유의미하다. 뇌과학적 연구들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 자극에 즉각 반응하기보다는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을 충분히 활용할 때,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때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지나친 흥분이나 자기합리화를 피하고, 자기 안의 양심이 제시하는 올바른 지점을 분별해내는 열쇠가 된다.
또 다른 핵심은 명상(瞑想)이다. 명상은 자기 자신을 ‘독수리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장치다. 고대 종교에서 신전 위에 자신을 올려놓듯, 내 마음을 한 발짝 멀리서 객관화하는 과정은 과거 경험에서 비롯된 욕망의 잔해를 걷어내고, 숨어 있던 ‘진짜 나’를 드러나게 한다. 종교학적 맥락에서도 명상은 신성(神聖)과 인간의 ‘접경지대’에 놓여 있다. 불교에서는 관조(觀照)를 통해 존재의 실체를 깨닫고, 기독교 전통의 관상기도 역시 신 앞에서 자신을 고요히 비우는 수행을 중시한다. 결이 다르지만 공통점은, 모두가 인간 내부의 심연(深淵)과 초월적 차원을 연결 짓는 통로라는 사실이다.
프랭클이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 자유”를 간직할 수 있다고 말했듯, 우리의 내면은 어떤 비극도 완전히 침식하지 못하는 신비한 힘을 품고 있다. 바로 그 힘이 ‘의미’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로고테라피가 제안하는 ‘창조 가치’, ‘체험 가치’, ‘태도 가치’는 우리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나갈 길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일기 쓰기나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에서부터, 비극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태도까지—이 모두가 곧 내가 책임지고 완성해갈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버소울’의 소리를 듣고, 숙고하고, 명상을 통해 자신을 돌봐주는 일이다. 이는 단지 고통을 덮어버리거나 순간적 위안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통로다. 인류의 오래된 종교와 철학은 이 진실을 여러 방식으로 노래해 왔다. 삶은 어디로부터 흘러왔는지 모를 수원(水源)과도 같지만, 그 물줄기가 오늘 내 손안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내가 그 물을 어디로 흘려보낼 것인지는 오직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언젠가 경험한 깊은 침묵과 내면의 목소리가 소중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