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눈물은 누가 닦아주나?

문재인∙김정은 두 정상의 정치적 결단 필요

by Thoughtful Tree

“어머니, 세상을 살면서 알지 못했던 가장 작은 것부터 가장 큰 것 까지를 생각하는 지금, 조그만 나무가 되어 돌아봅니다. 삶이 견디기 어렵도록 고통스러울 때, 당신의 궤적을 그리며 버릇처럼 강가를 거닐었습니다. 영육을 촉촉이 적셔주던 그 아름다운 강가를....


사랑하는 엄마, 이렇게 부를 때 제 가슴은 그저 가득합니다. 당신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 사이 당신을 내 안에 영원히 흐르는 쉼 없는 강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저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엄마, 어머니....”


필자는 장성에 온 지 두 달여 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이곳에 왔느냐고 종종 묻는다. 외지인이 조그만 읍내에 살고 있으니 당연히 궁금할 게다. 내 얘기를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잠시 내 얘기를 먼저 꺼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사람과 사람이 가슴을 열고 '맑은 영혼'으로 마주하고 싶은 까닭이다.


그녀와 동행한 이틀, 그리고 그녀가 떠난 어제부터 조금 전까지 헌법을 뒤지고 세계 인권선언문을 찬찬히 읽어보며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의 존엄과 가족, 그리고 행복에 대한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좋을지 고민하면서 인간을 새롭게,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차가운 ‘이성’으로, 그것이 법적 제도이든 서로 다른 국가 간의 이념이든 간에 ‘자연인’ 사람에 대한 권리, 즉 ‘인권’을 성찰해 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 상상도 하기 싫은 패악의 친족살인마저 빈번한 이 땅에서 나는 '무모'하리만치 그래도 사람을 믿고 싶다. 그래서 사람의 가슴에 말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먼저 가슴을 열고 내 얘기를 전개하는 이유다.


우리, 이제 가슴을 열어야 한다

한 사람의 영혼이 곧 인류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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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곳 장성에 있는 이유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그분들의 산소가 인근에 있어서 나는 힘들 때 부모님 산소를 찾는다. 미국에서 25년 여 동안 살며 힘들 때도 늘 그리운 사람이,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생각만으로도 온 가슴이 아득할 정도로 먹먹하다.


산소 잔디 위에 누워있으면 죽을 만큼 힘든 일도 견딜 수 있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눈물과 마음을 모두 열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나는 여전히 그분들의 자식이니까. 필자가 미국에 있는 가족을 떠나 이곳에 홀로 있으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게다.


이렇게 나는 여러분들에게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내가 겪고 있는 정치적인 이유는 그에 비하면 한낱 티끌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티끌만큼의 감정이 나를 움직이고 여러분을 움직일 수 있다고 나는 여러분, 즉 '사람'을 여전히 믿고 싶은 까닭이자 순수를 갈망하는 고집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류가 다하는 날까지 사람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공동운명체니까. 사람은 사람을 떠나 결코 행복할 수 없으니까. 그녀가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말하는 ‘가족’이 바로 그 사람의 시작이니까 말이다.


“가족, 나의 모든 것이자 삶 자체”

정부, 김련희 씨 국보법 위반으로 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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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씨에게 가족은 자신의 삶 자체다. 필자는 종종 그녀의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고, 지난 2018년 국가 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며 “13명의 류경식당 종업원과 김련희 씨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당시는 남북 정상회담이 크게 진전되고 북미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은 물론, 지구촌은 인간존중과 평화가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김련희 씨가 알고 있는 한국의 모든 정보가 국가 안녕을 위협할 기밀로 북한에 누설되면 북한 대남 공작에 이용돼 대한민국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다”며 김 씨의 북송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어놓은 채 막고 있다.


니체는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에 있다”라고 설파했다. 인류의 영원한 진보, 즉 새로운 문명으로의 끊임없는 변화를 주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변화는커녕 여전히 국가보안법(National Security Act) 태동기인 1948년 12월 1일에 머물러 있다. 참으로 비겁하다.


누구도 개인의 자유의지를 막을 권리는 없다. 하느님마저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이 신성한 수준에 이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개인의 이념과 사상이 두려워 감시하고 표현의 한계를 설정해야 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나? 진정 그렇게 비루한 국가인가? 개인은 언제까지 국가라는 거대 조직에 희생되어야 하는가?


엄밀하게 따지자면 인권은 국가를 초월한 개인의 존엄한 권리다. 그리고 국가의 존재 이유도 국민, 즉 사람을 위한 것이고 세상의 모든 조직이나 과학기술 역시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원칙에 충실해야 좋은 사회이고 삶이다.


11년째 억류 “가족∙고향 사무치게 그립다”

우리와 사고체계 다른 '순수'한 북한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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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은 흔히 가장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다. <레 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는 '장발장'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그 결과 가볍다고 소문난 프랑스 남자들에게 진중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깊은 인간을 선물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안드레이 공작'과 '피에르'라는 상호 보완적인 두 사람으로 완전한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에서 '미슈 킨' 백작이라는 완전히 순수한 사람을 창조하였다.


'순수(純粹)',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김련희 씨가 말하는 ‘가족’ 말이다. 필자에게는 북한을 여러 차례 왕래한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 그는 명문 사학의 저명한 사회학 석좌교수로 세계 여러 곳으로부터 초대를 받는다. 전공 분야로 그는 사회를 심도 있게 관찰하고 연구, 분석한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 그로부터 여러 차례 북한 주민에 대한 얘기를 듣고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이유는 사람들의 선함과 ‘순수’ 때문이다.


북한을 9차례 방문하고 <오마이뉴스>에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등의 여행기를 게재, 두 권의 책을 출간한 신은미 박사도 사람들의 순수성에 대해 같은 얘기를 한다. 요는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가치관과 행복, 그리고 가족애가 다소 다르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북한 주민들의 순수성과 가족애는 우리가 서구 자본에 물들기 이전의 1970~80년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김련희 씨가 “억 만금을 주어도 가족만 못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게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친족을 살해하면서까지 완전히 자본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니다. 사실 우려할만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희망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람들의 선함과 순수성을 여전히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1순위로 꼽은 행복의 조건은?

30% 정도의 깨시민들이 만든 기적,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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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이 5,020명을 대상으로 지난 2019년 5월 8일부터 6월 13일까지 한 달 넘게 다각도로 행복을 측정하는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1순위로 꼽은 행복의 조건이 ‘좋은 배우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31%)이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기엔 높은 숫자다. 그리고 우리는 이 30% 정도의 깨어있는 시민들로 오늘날 선진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루어 낸 것이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나는 그 기적을 믿는다.


2001년 미국 월드시리즈에서 애리조나가 우승한 후 한 기자가 승리 투수 커트 실링에게 “당신은 뛰어난 실력에 비해 연봉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커트 실링은 “내가 애리조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돔(dome) 구장 때문이다. 지붕이 있어서 햇빛이 강한 날에도 피부암에 걸린 아내가 언제든지 경기를 지켜볼 수 있다”라고 답했다.


어려울 때 우리 곁을 지켜줄 마지막 사람은 가족이다. 가족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구성원이요, 중요한 사회 환경이다. 따라서 건강한 사회의 조건은 건강한 가족이 절대적이다. 혹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르지만, 김련희 씨에게 가족은 그렇다. 그런 그녀를 우리가 가슴을 열고 이해해야만 이념이나 제도를 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천륜은 어떻게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만나지 못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급기야 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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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한마디의 말, 그것은 사랑이다.” 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으로 꼽히는 소포클레스의 말이다.


사람이 아프면 가족들이 병간호를 하며 밤을 새워 곁을 지켜준다. 놀라운 것은 가족들이 이렇게 환자의 회복을 도울 때, 의료진만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는 환자보다 적은 진통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가족의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가족을 찢어놓고 11년간이나 억류하고 있는 정부는 부끄러움도 모르나?


진미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가족은 서로 돌보는 사람들이고, 돌봄은 가족의 존재 의미이다. 부부가 서로를,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챙기고 돌보는 것은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의 돌봄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으며, 전 생애에 걸쳐 크고 작은 돌봄을 통해 생활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국민에게 국가는 가족과 같은 울타리다.


필자는 세 아이들이 있다. 그들의 생일이나 홀리데이 시즌이 되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가족이 모두 모여야 하는 자리에 내가 없기 때문이다. 우울증세가 깊어지고 괴롭다. 밖으로 나가 미친 듯이 걷는다. 몸을 학대할 정도로 걷거나 뛰어야 그런 감정에서 헤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한 달에 50만 걸음 가까이 걷는다. 그럼에도 나는 김련희 씨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는 게 정답이다.


“난 죽어서라도 고향으로 갈 거야”

그대가 이곳에서 꽃 피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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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꽃(Shadow Flowers), 김련희 씨의 서러운 이야기를 통해 분단의 현실을 담아낸 이승준 감독의 다큐멘터리다. 아프고 가슴이 탁탁 막힌다. 여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양식이나 보편적 상식과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인정과 권리가 없다. 인간의 존엄도 자유의지도, 가족도, 행복도, 모조리 분단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버린다. 상호 간의 이념 대립과 유치한 정치적 헤게모니, 그리고 비루한 체제 싸움에 가려 사람의 권리는 애초에 관심 밖이다.


민족의 평화를 지향하며 먼저 나서서(마중) 활동하고 있는 ‘장성평화마중행사위원회’(위원장 문희태)가 초청한 그와 동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은 대한민국 여느 주부들처럼 그저 보통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 간암 수술을 받고 수척해진 것 말고는 천성적으로 밝고 쾌활한 데다 달변이었다. 그래서 원래 달변인 줄 알았으나, 지난 11년간의 모진 시간이 그를 변화시킨 게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자기 보호본능의 발동과 누군가를 설득해야만 했던 절실함이 오늘의 그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에 외려 슬픔이 안개처럼 일었다. 왜 우리 사회는 인간을 규제하는가? 이렇게 왜소한 여성 하나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어떻게 필요한가? 가슴에서 울분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어디서든 살면 못살까?'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억 만금, 아니 그 어떤 것과도 가족을 비교할 수는 없다. 가족은 나에게 전부이자, 삶 자체이기 때문”이라는 그는 “오직 가족, 즉 자신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게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과 가족을 절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고리로 사고하는 사람이자, 천재들이 우수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듯 원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다.


절절히 사랑하는 연인들이 사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듯이 그는 가족이 그런 절대적인 ‘사랑’인 것이다. 자본에 의해 가족에 대한 가치나 생각이 다소 느슨해진 우리와는 다소 결이 다른 사람으로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북한의 체제나 문화 역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남북 간의 대화나 경제 및 문화적인 교류를 주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을 위한 두 정상의 정치적 결단 필요해

국가, 제도라는 틀 안에 ‘사람’ 가두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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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정부의 반응은 두 가지다. 통일부 대변인이 말하는 '전향서'에 본인(김련희)이 서명을 했다는 것과 김련희 씨를 돌려보내고 나서 다른 탈북자들이 돌아가려고 하면 어쩔 거냐는 것. '전향서'는 반강제적으로 작성됐다는 게 명확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서명을 했으니 돌려보낼 수 없다”는 말이 반복되고, 누구도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서명이나 정치적 논쟁 뒤에 가려진 실제 당사자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직접 봐야 하는데, 형식적으로 “국민이 됐으니까 보내지 못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한 개인의 영혼과 삶을 너무나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인간을 특정한 목적으로 틀 안에 가두는 일이 온당한가? 선례를 만든다는 변명 대신 역지사지해보자. 제도로 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할 때 필요한 게 정치적 결단이다. 이해관계를 조정해 조화를 꾀하는 것이 정치의 영역이고, 그 주체는 당연히 사람이다. 남북의 두 정상은 자국민 보호라는 첫 번째 책임을 지고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한다. 더 이상 비겁하게 체제나 제도, 선례를 들먹이며 숨어서는 안 된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사람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사람의 눈물은 누가 닦아주나?

난제 해결할 때 필요한 게 정치적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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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씨는 2011년까지 의사 남편과 딸을 둔 평양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평양시민으로 살던 김 씨는 간 치료를 위해 중국의 친척 집에 갔다가 브로커에게 속아 한국 땅을 밟았다. 대한민국 입국 직후 북한으로 송환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당한 그는 11년째 보호관찰 대상자로 살고 있다.


한 사람의 국민도 보호하지 못하는 나라가 무슨 국가인가? 사람이 제도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영혼도 살리지 못하는 정치가 어떻게 필요하며, 인간의 존엄과 가족의 행복을 파괴하는 체제나 이념이 언제까지 인간을 구속하게 내버려 둘 텐가? 지도자라면 응당 숨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자그마치 11년이다. ‘김련희’라는 한 사람은 물론, 그 가족과 국제사회에 얼마나 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텐가? 그만 그와 그 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옳다. 그래야 사람이고 국가가 아니겠는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권

인류, 상생 위한 선한 협력이 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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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인간 존엄의 존중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인간 존엄과 명예를 구분하면서 존엄 개념의 불명확성에 대해서도 설명, 법은 도덕에 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으며 법규범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인간은 이성적∙윤리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한 존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헌법 제2장 10조에서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된 점에서 천부인권, 즉 전 국가적인 자연권을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고, 나아가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하여 불가침∙불가양의 전 국가적인 자연권을 헌법에서 선언함으로써 이를 실정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존엄성은 헌법이 지향하는 최고의 궁극적 가치이며, 모든 법령 제정과 해석의 기준이 된다.


더불어 세계 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제1조에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이고 또 존엄 및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그들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형제애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Article 1. All human beings are born free and equal in dignity and rights. They are endowed with reason and conscience and should act towards one another in a spirit of brotherhood.) 또한 제3조에서는 "모든 사람은 생명, 자유 및 신체의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돼있다. (Article 3. Everyone has the right to life, liberty and security of person.)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일은 온 인류를 그렇게 여기는 시발점이다. 휴머니즘 없는 지구촌 공동체가 지난 수 천 년의 시행착오, 즉 헤게모니(hegemony) 싸움을 거듭한다면 인류는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다. 평화와 상생(win-win)을 도모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문명인인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남북의 두 정상은 이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인류애와 상생의 시작이다.

참고문헌: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세계 인권선언) ▲International Human Rights Treaty (국제 인권조약집) ▲신 헌법 원론 ▲헌법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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