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클라우드베리 언덕
나나는 주머니 속 은색 금속 조각을 만졌다.
표면에 새겨진 선들이 손끝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갑자기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은 달콤하면서도 차갑게 볼을 스쳤다. 언덕은 빛을 머금은 듯 환했고,
꼭대기까지 하얀 열매가 가득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열매는 작은 구름 조각처럼 부드러웠다.
피핀이 어깨를 펴고 말했다.
“여기가 클라우드베리 언덕이야. 규칙을 풀면 엘리에게 갈 수 있어.
오늘의 열쇠는 이거야. 짝수, 그 짝수와 같은 변을 가진 도형, 그 도형의 변의 개수의 배수.”
입구에서 둥근 발판들이 떠올랐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 옆에 숫자들이 박혀 있었다.
나나가 규칙을 따라 입술을 달싹였다.
“먼저 짝수, 다음은 그 짝수와 같은 변을 가진 도형, 마지막으로 그 도형의 변의 개수의 배수.”
나나는 2라고 쓰여 있는 발판 위에 한 발을 살짝 올렸다. 옆에는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팔각형이 반원으로 놓여 있었다.
순간, 발판이 흔들리며 주변도 같이 흔들렸다.
풍경이 한 장 뒤로 넘겨지듯 뒤집혔다.
피핀이 서둘러 말했다. “두개의 변의 개수로 만들어지는 도형은 없어. 4로 시작하면 돼.”
나나는 다시 4라고 쓰여 있는 발판 위에 올라섰다.
사각형 발판을 밟고 8이라고 새겨진 발판 위에 올라섰다.
발판들이 곧 이어 딱 맞물리며 길이 되었다.
아이들은 호흡을 맞춰 올라갔다. 6, 육각형, 12를 지나고 곧이어 8, 팔각형, 16의 발판을 밟았다.
밟을 때마다 공기의 떨림이 고르게 정리됐다.
나나는 속으로 규칙을 반복했다. “짝수, 도형, 배수.” 중턱까지 오니 바람이 거세졌다.
하얀 열매가 빗방울처럼 흩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길이 더 촘촘해지더니 곧이어 두 갈래 길로 갈라졌다. 왼쪽 길은 4에서 시작해 사각형을 지나 12로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4에서 사각형을 지나 8로 지나가는 길이었다.
돌판 아래 글씨가 번쩍였다.
표시된 수와 합이 같은 길을 골라라 바닥 모서리에 20이 떠올랐다.
나나가 빠르게 셌다. “4+4+12=20, 4+4+8=16.”
유진이 왼쪽 길을 밟자 길이 고정되고, 바람이 한 톤 낮아졌다.
다음 구간은 숫자만 빽빽했다.
2, 4, 6, 8, 10, 12, 14… 다음에 숫자가 적혀 있지 않은 돌판들이 있고, 돌판 위에는 점이 하나 또는 둘 찍혀 있었다. 피핀이 손짓했다.
“두 점이 찍힌 발판만 밟아. 숫자의 홀짝이 아니라 칸의 점을 봐!” 유진이 6이 적힌 돌판을 밟다가 흔들거렸다.
돌판의 숫자는 짝수였지만 점이 하나였다.
나나가 재빨리 유진의 손을 잡았다.
둘은 4(2번째), 8(4번째), 12(6번째)의 두 점이 찍힌 돌판들만 골라 디뎠다.
매끈하게 이어진 길에 도착하니 넓은 들판이 보였고 수많은 종들이 공중에 떠 있었다.
종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고, 몇 개에는 별표가 붙어 있었다. 바닥 아래 글씨가 번쩍였다.
소리의 합이 30이 되게 종을 울려라
같은 종은 두 번 울리지 마라
유진이 6, 8, 10번 종을 울려 24를 만들었다.
나나가 종 뒤를 돌며 속삭였다.
“별표는 두 배 처리.” 피핀이 끄덕였다.
유진이 마지막으로 3번 종을 울리자, 종들이 어우러져 울리는 소리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길이 새로 생겼다.
그들은 길을 따라 걷다가 언덕에 도착했다.
언덕의 꼭대기에는 돌그릇 두 개가 있고,
돌그릇 아래에는 도형 모양의 열매가 가득 쌓여 있었다. 삼각형 열매에는 3, 사각형 열매에는 4, 오각형, 육각형, 팔각형 모양의 열매에 각각 5, 6, 8이라고 쓰여 있었다.
작은 글씨가 바닥에 새겨 있었다.
같은 모양의 열매 껍질을 짝수 개만 사용하여 각각의 돌그릇의 합을 24로 만들라
왼쪽 그릇은 팔각형 열매 두 개와 사각형 열매 두 개로 금세 채웠다.
오른쪽 그릇을 채우기 위해 유진이 삼각형 열매 3개를 집자, 나나가 고개를 저었다. “짝수 개만.”
“삼각형 열매 두 개와 육각형 열매 두 개를 합하면 모두 18이 되는데 아직 모자라.” 유진이 말했다.
나나가 잠시 멈췄다.
“삼각형 열매 두 개를 더 넣으면 18에 6을 더하니 24가 돼.” 두 그릇이 동시에 은빛으로 빛났다.
길이 다시 가팔라졌다.
이번 구간은 도형으로만 이어졌고, 도형 아래에는 아주 작은 숫자들이 번쩍였다 사라졌다.
구름 옆으로 글씨가 떠올랐다.
짝수의 변만 지나가라
그들은 사각형(4), 육각형(6), 팔각형(8) 순서로 건넜다. 팔각형을 밟는 순간, 언덕 위쪽에 둥근 문이 열렸다.
구름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문 안에 작은 굴이 있고 벽은 유리처럼 맑았다.
중앙에 달걀만 한 씨앗이 둥실 떠 있었다.
표면은 따뜻했고, 점 12개와 선 3개가 씨앗의 주위를 돌며 움직이다가 멈췄다.
피핀이 설명했다.
“시간의 씨앗. 다음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
유진이 속삭였다.
“열둘은 시곗바늘. 세 개의 선은 순서?”
그때 굴 입구가 어두워졌다.
케일러스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너희가 시간을 들여 얻은 것인가, 아니면 운인가?”
나나가 앞에 섰다. “우리가 규칙을 찾았어.”
그가 낮게 말했다. “나는 게으른 자들의 시간을 거둬 위대한 자에게 준다. 너희들이 하는 일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나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모두의 시간이 소중해. 게으르다는 이유로 덜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야.”
케일러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으나 곧 차분해졌다.
“선택은 늘 흔들린다. 곧 알게 되겠지.”
케일러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밖으로 나오자 구름이 천천히 모여 길이 되었고 끝에는 좁고 높은 탑이 보였다.
언덕에서 바람 종이 2, 4, 6의 음으로 짧게 울렸다.
나나는 씨앗을 가슴께에 대고 눈을 감았다.
씨앗 위로 2·4·6 이 하나씩 떠올랐다.
언덕 앞에 구름이 모였다가 부드럽게 흩어졌다. 언덕을 내려가자 넓은 들판으로 이어졌다.
작은 해시계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고, 그림자가 기울어 있었다.
해시계들 위로 글씨가 떠올랐다.
빨리 가는 그림자를 부러워하지 마라 바른 그림자는 제자리에 선다
유진은 바늘에 손을 대어 자신의 그림자를 맞췄다.
두 아이의 그림자가 잠깐 겹쳤다가 다시 갈라졌다.
유진이 씨앗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빠른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을 고를 거야.”
나나가 씨앗을 더 꼭 쥐었다.
그들 앞으로 계단이 드러났다.
꼭대기의 작은 문 위엔 문장이 있었다.
다음 문을 열 낱말을 말하라.
나나는 은색의 금속 조각을 꺼내 씨앗 옆에 댔다. 씨앗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조각의 격자도 씨앗의 박자와 맞물리며 미세하게 떨렸다. 깊게 파인 선들이 어딘가 글자 같았다.
처음 드러난 건 N, I, L. 유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N… I… L?” 나나가 각도를 바꾸자,
선들이 모여 LINE이 되었다. 피핀이 미소를 지었다.
“선. 오늘 내내 밟아 온 그 길의 이름.”
나나가 또렷하게 말했다. “선.”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씨앗과 금속 조각은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안에서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구름이 옆으로 흩어지며 좁고 높은 탑의 입구가 드러났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멀리 언덕 아래에서는 여전히 종들이 울렸다. 그들은 탑을 향해 다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