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구름다리 너머의 마법탑
구름다리 앞에 서자 모두가 한순간 숨을 멈췄다.
발아래의 흰 안개가 구름인지 마법의 장막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위로 아주 얇고 긴 다리가 뻗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가늘게 떨렸다.
유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걸 건너라고?”
나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곧 눈을 돌렸다. 발끝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올라와 종아리를 꽉 잡았다.
피핀이 날개를 털며 말했다.
“여기는 구름다리야. 마음이 흔들리면 다리도 같이 흔들려.
하지만 규칙을 붙잡으면 길이 안정돼.”
“규칙?” 유진이 되물었다.
“숫자, 박자, 질서. 이 셋을 맞추면 다리는 무너지지 않아.”
그들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처음엔 다리가 약하게 흔들리더니 점점 크게 좌우로 출렁였다.
그때 어둠 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흔들리면 떨어진다. 떨어지면 끝이다.”
그림자여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리 옆으로 밧줄이 스치듯 스르륵 미끄러졌다.
밧줄이 떨어지자 유진이 놀라 발을 헛디딜 뻔 했다.
“끊어지려는 거 아냐?” 피핀이 급히 외쳤다.
“아냐! 여왕은 환영으로만 보여. 진짜로 끊을 힘은 없어.
하지만 겁먹으면 발이 미끄러져 스스로 빠지게 되지.”
피핀이 날개를 흔들며 말했다.
“짝수 박자로 걸어가자. 둘, 넷, 여섯… 박자를 맞추면 돼.”
유진은 잠시 망설이다 나나의 발걸음에 맞춰 움직였다.
“둘, 넷, 여섯…”
피핀이 위에서 날개로 딱, 딱 박자를 쳐 주었다.
신기하게도 다리는 조금씩 흔들림을 멈추고 단단해졌다. 그림자여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희가 붙잡는 건 약한 규칙일 뿐. 결국은 무너진다.”
그러나 다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여왕의 그림자는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구름다리를 다 건너자 눈앞에 탑이 나타났다.
하늘 끝에 닿을 듯 곧고 높았다.
하얀 돌벽은 매끈했고, 창마다 은빛 무늬가 흐르며 모양과 숫자로 바뀌었다가 사라졌다.
“저기가 엘리의 탑이구나.” 유진이 숨을 죽였다.
피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엘리는 규칙을 물어보기를 좋아해. 무엇보다 스스로 근거를 말하게 하지.”
탑 문 앞의 바닥에는 얕은 원이 새겨져 있었다.
시계 눈금처럼 점이 열둘 둘러 있고, 가운데는 비어 있었다.
나나는 에버라이트 시계를 쥐었다. 바늘이 아주 천천히 떨렸다.
나나는 원의 점을 짚었다.
“둘, 넷, 여섯…” 짝수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이자 중앙에서 빛이 퍼졌고,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탑 안은 밝았다. 둥근 홀을 따라 나선형 서가가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에 도형과 숫자가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홀 한가운데 둥근 테이블,
그 뒤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눈빛이 놀랄 만큼 차분했다.
“어서 와.” 소년이 인사했다.
나나는 속삭였다. “정말 우리 또래잖아…”
피핀이 미소 지었다. “그래. 이 아이가 엘리야.”
엘리가 부드럽지만 단정하게 말했다.
“나는 답을 바로 주지 않아. 너희가 근거를 찾아 말해야 해. 준비됐니?”
엘리는 테이블 위의 얇은 판 하나를 밀었다.
판 위에는 도형들이 줄지어 있었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까지는 또렷했지만, 그다음 세 칸은 비어 있고 밑에 점만 찍혀 있었다.
다섯 개, 여섯 개, 여덟 개의 점이었다.
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갑자기 도형이 사라지고 점만 있지?”
나나는 손가락으로 판을 짚으며 말했다.
“삼각형은 변이 3개, 점은 1개. 사각형은 변 4개, 점 2개. 오각형은 5, 점 3. 육각형은 6, 점 4…
그러니까 점의 수는 변의 수에서 2를 뺀 숫자와 같아.
그렇다면 점 5개는 칠각형, 점 6개는 팔각형, 점 8개는 십각형을 가리키는 거지.”
엘리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보이지 않아도 작은 단서로 전체를 짐작할 수 있어야 해.
그것이 규칙을 읽는 힘이지.”
판의 빈 칸에 칠각형, 팔각형, 십각형의 윤곽이 환히 떠올랐다.
벽 쪽 작은 등불 하나가 켜졌다.
엘리는 숫자판을 꺼냈다. 거기에는 2, 4, 8, 16, □, □이 적혀 있었다.
네 번째 수 16 위에는 점 2개, 그다음 빈칸 위에는 점이 4개가 찍혀 있었다.
유진이 반짝이며 말했다.
“간단하네! 앞의 수에 두 배씩. 빈칸은 32, 64!”
하지만 숫자판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등불도 그대로였다.
“어… 왜?” 유진이 당황했다.
피핀이 중얼거렸다.
“뭔가 빠졌나 봐.”
나나는 점을 유심히 보았다.
“이 점들은 다음 항을 만들 때 반복하는 신호야.
16 위 점 두 개는 두 번을 곱하라는 뜻이고,
그다음 빈칸 위의 점 네 개는 네 번 곱하라는 뜻이야.
유진이 금세 받아들였다.
“아하! 그래서 수열은 2, 4, 8, 16, 32, 128.
내가 처음에 말한 32까지는 맞았지만, 그다음은 64가 아니라 128이네.
빈칸 위의 점 네 개가 네 번 곱하라는 뜻이니까!”
그 순간 빈칸 위로 32와 128이 선명해졌다. 등불이 환히 켜졌다.
피핀이 거들었다.
“이 탑은 설명 없는 답을 싫어해.”
나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점의 개수는 곱하기의 반복 횟수. 단서를 제대로 읽어냈어.”
엘리는 숫자판을 치우고 바둑판같은 큰 격자판을 올려놓았다.
칸마다 숫자가 적혀 있고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짝수 칸만 지나가며 가로의 합과 세로의 합을 같게 하라
유진이 신나서 말했다.
“그럼 짝수 숫자만 더하면 되지! 가로 합 18!”
나나가 세로줄을 확인했다.
“세로 합은 12야. 안 맞아.”
피핀이 고개를 저었다.
“짝수 칸이 꼭 짝수 숫자를 뜻하진 않을 거야.”
엘리가 판을 톡 두드렸다. 각 칸에 좌표(행, 열)가 떠올랐다.
그중 행과 열이 짝수인 칸들이 은빛으로 빛났다.
나나의 눈이 반짝였다.
“아하! 짝수 칸은 숫자가 아니라 좌표의 합이 짝수인 자리구나.
(1,1), (1,3), (2,2)… 이런 식으로”
유진이 다시 계산했다. 이번엔 짝수 칸만 밟으며 가로 합을 맞췄다.
“가로 합 18.”
하지만 세로 합은 10. 또 틀렸다.
“왜 또 안 맞지…?” 유진이 풀이 죽었다.
나나는 판의 중심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같은 칸을 같은 횟수로 지나가야 해. 거울처럼 대칭이 되게.”
피핀이 중심을 날개로 가리켰다.
“그래, 대칭! 가로에서 고른 칸과 세로에서 고른 칸이 서로 짝이 맞아야 합이 같아질 거야.”
세 사람은 경로를 다시 짰다. 좌표 합이 짝수인 칸만 고르고,
중심 대칭이 되게 지나갔다.
나나가 합을 확인했다. “가로 18.”
유진이 따라가며 외쳤다. “세로도 18!”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판이 열리며 작은 상자가 드러났다.
안에는 박자 끈과 숫자 구슬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엘리가 상자를 나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다음 장소에서 쓰일 도구야.”
그때 홀 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창문 틈에서 그림자가 길게 뻗었고, 낮은 웃음이 흘렀다.
“아이들은 실수한다. 실수한 시간은 모두 내 것이다.”
케일러스의 목소리였다. 서가에 그림자가 쏟아져 나오더니 유진의 발목을 감쌌다.
“앗, 발이…!”
피핀이 외쳤다.
“박자 끈을 써! 네가 세운 규칙을 외쳐!”
나나가 크게 말했다.
“네 칸마다 반복, 4의 배수!”
나나는 박자 끈의 끝을 꽉 쥐고 박자를 셌다.
“4, 8, 12, 16! 다시, 20, 24, 28, 32!”
발걸음이 규칙적인 박자를 찾자, 발목을 잡던 그림자가 서서히 힘을 잃었다.
케일러스가 낮게 쏘아붙였다.
“규칙 따위로 시간을 풀 수 있다고 믿나?”
피핀이 단호히 말했다.
“넌 실수를 붙잡아 시간을 빼앗지. 하지만 우리는 실수를 설명으로 바꾼다. 그게 차이야.”
그림자가 사라지고 유진이 자유로워졌다.
“아… 진짜 위험했어.”
엘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실수는 잃어버리는 게 아니야. 다시 풀 기회일 뿐이지.
케일러스는 그걸 왜곡할 뿐이야.”
홀 위쪽에서 등불이 환히 타오르자, 벽의 무늬들이 이어져 큰 도형을 만들었다.
마치 별자리 지도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시간의 흐름을 그린 그림이었다.
굵은 선은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곳, 가느다란 선은 느리게, 끊어진 점은 시간이 멈추거나 뒤틀린 자리였다.
나나는 붉게 깜빡이는 점을 가리켰다.
“저기, 점이 불안하게 깜빡여.”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곳은 시간이 구부러지는 자리야. 방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지.”
유진이 낮게 물었다. “케일러스…?”
엘리의 표정이 굳었다.
“그럴 가능성이 커. 그는 게으른 자의 시간을 거두어 위대한 자에게 준다고 주장했지.
나는 그 생각을 거부했고, 그날 이후 우리는 갈라섰어.”
창문 사이로 얇은 그림자가 스쳤다.
“오랜만이군, 엘리.” 케일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여기는 아이들의 공부방이다. 물러나라.”
케일러스가 낮게 웃었다.
“아이들은 실수하기 마련이지. 그 실수한 시간은 내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길게 울렸다.
바로 그때 바닥이 부르르 떨리며 홀 한가운데 원형 문이 떠올랐다.
문 안쪽으로 숲이 보였지만, 나무들은 바람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잎사귀도 공중에 멈춘 듯했다.
나나가 숨을 죽였다.
“여긴… 시간이 멈춘 숲?”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규칙이 단순해 보이지만, 서두르면 길을 잃는 곳이야.
바람도 그림자도 박자에 따라 멈추거나 움직여.”
엘리는 마지막으로 조언했다.
“스스로 말하면서 걸어. 설명이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거야.”
유진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면 케일러스가 또 방해하겠지.”
피핀이 용기를 주었다.
“우리가 흔들려도 근거가 있으면 무너지지 않아.”
나나는 박자 끈을 꼭 쥐고, 구슬이 꿰인 곳을 바라보았다.
네 칸마다 반복, 4의 배수 표시.
“좋아. 준비됐어.”
그들은 원형 문을 향해 걸어갔다. 빛이 스며들며 공기가 느려졌다가 사라졌다.
발을 내디딘 곳은 시간이 멈춘 숲이었다. 나무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림자는 땅에 붙은 채 가만히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깊게 고요했다.
유진이 낮게 속삭였다.
“…정말 시간이 멈춘 것 같아.”
피핀이 날개를 접으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네 박자에 맞춰 움직여. 박자를 놓치면 이 숲에서 길을 잃어.”
숲의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