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저 퇴사하려고요."
퇴사하기로 결심한 지 보름 만에 회사 대표님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직할 곳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사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주변 지인들이 퇴사 고민을 말할 때마다 '이직이 결정되면 그때 퇴사해!'라며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라며 조언을 빙자한 꼰대질도 자주 했으니 말 다 했다. 그런 내가 무슨 뽕에 취했는지 퇴사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선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사실, 나름대로 내 인생의 다음 스텝에 대한 계획은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떠들고 다녔더니 이젠 대본을 만들어 외울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10초짜리 버전은, '세계여행 가려고. 더 늦으면 평생 못 갈 것 같아서.'이고, 1시간짜리 술안주 버전은 '고민이 많던 시기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행할 때 만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너무 좋더라.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싶어서 여행 관련 산업으로 이직할까 하는데, 이직하기 전에 세계여행 한 번 가보려고. 미뤄뒀던 사이드 프로젝트도 좀 더 해보고.'이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떠나야 하는 그럴싸한 이유와 1년 치 계획을 세우고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너무 많이 떠들고 다녔더니 이젠 떠나지 않으면 뻘쭘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은 덤.
이 계획을 세워놓고는 연말이라고 사주도 보러 갔었다. 사주 선생님은 나한테 '퇴사해도 괜찮다', '올해 이직 운은 없다', '해외에 나가도 괜찮다'고 했다. 이 얼마나 내 계획과 딱 맞는 완벽한 사주팔자인가. 명리학의 힘을 얻어 한층 더 용기를 얻은 나는 본격적으로 세계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여행과 함께할 사이드 프로젝트도 기획하며 하루하루 설레는 날들을 보냈다. 전세금 이자로 내 퇴직금을 낭비하지 않으려 집도 내놨고, 인생 첫 여행용 배낭부터 트래킹화에 지갑까지 주문하고, 해외 출금 수수료가 없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체크카드도 신청했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잘 진행되었다. 그렇게 퇴사를 선언한 뒤 2달이 지난 2월 말. 햇수로 5년이나 알고 지냈던 회사를 떠나 백수가 되었다.
하지만, 사주 선생님도, 프로 계획러였던 나도 전혀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코로나-19' 되시겠다. 처음엔 중국, 홍콩, 대만 정도만 심각해서 동남아는 괜찮겠지 했다. 어디든 한국만 아니면 됐다. 베트남 다낭으로 첫 출발지를 정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다음 어학연수차 두 달간 머무를 필리핀행 티켓도 끊었다. 지금에야 전 세계의 국경이 닫힌 펜데믹 시대가 왔지만, 그때만 해도 그 정돈 아니겠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제일 용감하다고,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2009년에도 아무렇지 않게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던 걸 보면 안전불감증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필리핀행 티켓을 끊은 다음 날, 경유지였던 싱가포르의 국경이 닫혔다. 입국은 물론, 경유도 금지됐다. 이어서 첫 여행지로 결정했던 베트남도 막혔다. 모든 비행기표를 취소해야 했다.
계획도 다시 세워야 했다. 그사이 인도에서도 감염자가 나타났고, 최애 동남아 여행지였던 태국도 막혔으며, 이탈리아가 새로운 진원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나둘, 전 세계의 국가들이 국경을 막으면서 여행을 갈 수 있는 나라가 없어졌다. 다행히도 어학연수를 가기로 했던 필리핀 세부만 빼고. 바로 필리핀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어학원에 갇혀 영어 공부를 하면서 두 달을 보내고 나면,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두 달 뒤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서 한국으로 잠시 귀국한다 해도, 한국에서 할 일 없이 백수 생활을 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 판단했다. 마음을 정하고 이틀 뒤, 유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필리핀 정부에서 어학원의 운영을 한 달 동안 금지했다고 했다. 그렇게 마지막 보루였던 필리핀마저 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열흘 안에 일어났다.
지금은 모든 계획을 무기한 보류하고 본의 아니게 본가에서 효도하는 백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여행 계획을 완전히 취소한 것은 아니다 보니 취업을 할 수도 없고, 떠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으니 여행 준비를 할 수도 없다. 하루하루 뉴스를 보며 전 세계의 상황이 어떤지 지켜보고, 나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마음 졸이며 생활하는 것 외에는. 이제는 국경이 열려 여행을 갈 수 있게 된다 해도, 당분간은 이전의 설렘 가득한 여행과 다른 여행이 될 것 같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세계여행을 결심했는데, 여행의 낭만이 사라져 버린 시대가 되었다.
나름대로 인생의 다음 스텝을 정하고 회사에 퇴사를 선언했던 몇 달 전, 조금만 더 심사숙고하여 계획을 세웠더라면 지금 이 상황에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까? 지금, 과거의 나에게 돌아간다면 뭐라고 조언해야 할까? 계획이란 미래의 불확실함을 줄여주는 행위일 뿐,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