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가을. "화" 네 개
2007년 가을. 화 네 개
(화, 하나)
"엄마!" 나의 부르는 소리에, '왜 그러냐'는듯 물끄러미 쳐다보는 어머니. 나는 손에 들은 책을 앞으로 내보인다. "왜 제 얘기를 외삼촌에게 말해서 이런 소리를 듣게 했나요!"라고 외치며, 책을 엄마 앞에 "툭" 내던진다. 몇 주 전 "외삼촌이 그동안 적은 글들 모아 만든 책이라고 하네, 너도 가져갈래"라고 말하시고 책 한 권을 내 앞에 내려놓은 어머니. "녜"라고 답하고 받아 온 책 한 권. 한자 고사성어 가득한 글들이다. '야~ 역시 글은 아무나 못쓰겠네, 난 안 되겠어' 읽어 갈수록 글을 쓴다는 거에 대한 한줄기 나의 꿈은, 저 하늘 위에 뜬 구름을 잡겠다는 헛생각이라는 확신이 든다. 읽어가던 중 기러기 가족 이야기 나온다. 신랄한 비판. '이게 뭐야, 다 내 얘기네' 나의 기러기 아빠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외삼촌. 나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는 건, 나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전통적 가부장제적 유교주의 사상들 가득한 책 내용들. 기러기아빠에 대한 사회적 비판 분위기 속, 외삼촌의 글. 나는 겨울 찬 물속에 손을 담그는듯한 쓰라림을 느낀다. 와이프와 두 딸들을 캐나다로 보낸 후, 홀로 남은 나는, 성당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사실조차 '홀로 남은 남자는 신앙생활에 빠질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으니..
(화, 둘)
기러기 아빠 생활 수년되었다. 가족 없는 외로움은 시간이 갈수록 쌓여간다. 세게 튼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외로움 몰아 칠 때는 물을 맞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지난 연휴 모처럼 한가한 시간, 침대를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커튼이 쳐진 그늘진 실내, 알 수 없는 침묵의 무거움 짙게 깔린 깊은 산속 동굴 같았다. 숨이 막힌다. '어디던지 나가야겠다' 참을 수 없는 서러움에 운전대를 잡았다. 88 고속도로 강동방향으로 가다가, 내부순환도로를 만났다. '동쪽으로 계속 가면 어디까지 갈지, 돌아올 길은 있는지'. '일단 내부순환로 따라가자'. '이길로 빠지면 북한산 방향이네 그냥 더 가보자'. 이렇게 한바뀌 돌아 결국 다시 집으로 왔다. 한가한 연휴 오후, 따뜻한 햇살, 포근한 공기이건만, 폭풍우 같은 외로움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듯, 날카로운 칼에 베인듯한 쓰라림에 구겨진 종이 쓰레기 같은 하루이다. "연휴 싫다" "출근하고 싶다" 갑자기 화가 난다.
(화, 셋)
지방 근무, 평생 처음 살아보는 지역이다. 시내 보도블록에서 만나는 사람들, 길 옆 먼지 뒤집어쓴 풀 한 포기, 바람 소리, 물 냄새 하나하나 낯설다. 퇴근하면 쓸쓸히 그 시간을 기다린다. 밤 깊어지면, 캐나다 아내, 두 딸들 등교시키고 잠시 한숨 돌리는 시간이다. 컴퓨터에 영상 통화 장비를 설치하고 영상 통화를 한다. 이런저런 얘기 나누던 중 참을 수 없는 욕정. 숨결마저 거칠어진다. 1년에 한두 번 몬트리올 오가던 젊은 나이. "어제 별일 없었나?", "애들 학교 잘 갔나?" 우리 부부에게 그 통화는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는 신성한 의식, 혼인성사의 또 다른 반복이다. 마치 눈앞에 있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선채로 나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로 다가가고,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속을 파고든다. 거칠게 그녀를 움켜 잡는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욕망, 치솟는 욕정 지금도 생생하다. "난 딴짓 안 해, 우리 부부 이혼 안 해, 애들 공부할 나이 때에 해줄 거야" 나도 모르게 화가 나 소리친다.
(화, 넷)
그토록 처절하도록 외롭고 힘든 기러기 아빠 생활. 사랑하는 두 딸, 남성 위주의 유고적 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에 여성으로 살기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은 간 곳 없다. 언제라도 터져 나오듯 말 듯 불안한 마음상태. 사소한 일에도 불쑥 내지르듯 대꾸하고 목소리 커지는 것은 나의 말버릇 탓만은 아니다. '바꿔야겠다' 내 안에 들어 있는 분노, 화, 불안, 스트레스. 가족 없는 외로운 생활과 이를 질타하는듯한 사회 분위기. 나는 바닷가 바람 부는, 겨울 찬바람 앞에 선 듯, 몸을 웅크릴수록 마음은 악으로 가득 차 부풀어 간다. '이런 스트레스 몰랐나?' '그 몇 년을 참고 견뎌내지도 못하면서 뭘 가족들을 캐나다로 보내고 지랄이지'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