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그리고 이별
(1/4) 데이트
"그때도 이런 마음이었어." "학교 후배 사귀다 헤어질 때." 나는 우리의 줄타기 같은 만남을 지우듯 말을 뇌까렸다.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내 말을 듣는다. 턱 툭턱, 누군가 우리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런 말 왜 해요." 그녀는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는 듯 손을 저었다. 눈과 눈이 만난다. "퉁"하는 소리, 발밑이 꺼지는 아찔함이다.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이다. 듣지 않으리라는 아니 말하지 말라는, 떨리는 입술. 서울 용산 후미진 뒷골목 카페. 창밖은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외로운 바람결 따라 나뒹굴고 있을 낙엽은 찬 겨울 거리를 떠다닌다. 머릿속이 헛돈다. 그녀를 만난 지 1년이 지나고 있다. "너를 사랑해"라는 말 대신, 나는 낡아 부스러지는 종이장 같은 첫사랑을 들먹인다.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한다. 나의 입을 노려본다. 나는 갑자기 할 말 잃은 듯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간다. 마음을 정리한 듯 가만히 바라본다. 그녀 앞에서 첫사랑 얘기를 불쑥 끄집어낸 것은 "헤어지자"는게 아니다. 도리어 "나를 사랑해 달라"는, "나에게 관심 가져달라"는 호소이다. 어린아이 같은 어리광이다. 놀랐다. 그녀의 따질듯한 목소리. 내가 좋아한다는 얘기를 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나를 오해하나요?', '내가 뭘 해 주기를 바라나요?', '나를 갖고 싶은가요?', '당신 말을 따르라고요?'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눈, 검은색 바탕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아니 생각한다. '첫사랑 따위로 너를 포기하지 않아!' 나의 소리 없는 사랑이, 그녀 귀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2/4) 결혼
본관 앞 잔디 광장, 하루하루 초록빛으로 물들어간다. 가로수 벚꽃, 바람 따라 휘날린다. 대학 생활 수년째, 나 자신 삶의 고민에 물들기 시작할 무렵, 무언가에 쫓기듯, 그래야 하기라도 한 듯, 대부분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가끔 가던 동호회 모임에서 그녀를 건너본다. 아담한 키, 수줍은 미소, 양 볼 가득 보조개가 예쁜 여자. 세상의 기쁨이랑 즐거움은 모두 가진듯한 그녀. 분명 그녀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시작이 언제 부더였는지는 모른다. 어쩠던, 아직까지도 결혼한 지 십 년 이십 년 아니 언제까지라도.
아내가 물었다. 끈질기게 아니 유혹하듯 물었다. 나는 말한다. '나는 순진하나?'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지껄인다. 아니 그때도 그녀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대학 때부터 좋아하던, 사랑하던 후배가 있었다." "더 말해봐." "더 얘기해 봐." "재미있잖아." "아무 말 안 할게." "다 지난 일인데 뭐." 따뜻한 실내였다. 어딘지 안다. 아니 나의 잘못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 나에게 "하라"고 한다. 그녀의 입술로 다가갔다. 얼굴이 맑고 밝은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있다. 아니 하얀 그리고 분홍빛 얼굴이다. 나의 입술 아니 그녀의 입술이다. 달콤한 부드러움 그것, 첫 키스이다. 촉촉한 눈물 같은 부드러움이다. 나는 속삭였다. '사랑한다.'라고 아니 그냥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도 나를 받이 들인다. 나의 그 말에도, 아니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 생각은 날았다. 푸른 하늘이 그곳에 있다. 사방이 푸르스름하다. 아내가 뭐라 할지 모르니까, 분명 말은 하지 않는다. 갑자기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고 할지? "빌어먹을 사랑"이라고 떨리는 입술로 내뱉을지. 뭐라도 부술 듯 조각조각 낼 듯할지, 그러나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내 사랑의 시작은 분명 그때 그녀와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사랑 따위로 아내를 버리진 않아'나는 속으로 다짐한다.
(3/4) 사별
'서울에서 잘 지내겠지.' 지난주 항암 주사를 맞고 퇴원하면서 아내는 서울에 남았다. 홀로 강릉 집으로 온 후, 동호해변 찾아간다. '역시 사람은 이런 곳에서 살아야지' 짙은 파란색 하늘 핑크뮬리 빛으로 물 들어가는 서쪽 하늘. '동해에서도 석양을 만나다니.' 좁은 도로옆 천천히 가라고 눈길을 붙잡는 부드러운 꽃송이. 얇은 종이 같다. 매끄러운 유리 닮았다. 그녀의 입술 같은 흐늘림이다. 아직은 덜 자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 분홍빛 꽃들이 아기자기 모여 한 송이 한 송이 피어있다. 지난가을 강릉으로 이사 오고 처음 본 나무 아니 꽃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 가린다. 그 꽃이 배롱나무 꽃임을 처음 알았다. 강릉 이사 오고 나서, 이 나이 되어서야, 꽃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런 삶 아니 사랑 가치 있나?'
차가운 바람 불 무렵 아내를 떠나보냈다. 미처 슬퍼하기도 전에 시작된 어머니 항암 치료. "입원 일자 맞춰서 대구 갈게요." 대구 가면서 들른 안동 병산서원. 그토록 붉은빛 가득한 줄 몰랐다. 한 산 가득 초록빛, 낮은데 낮지 않던 앞산과 굽이도는 강을 바라보며 흙길 걸어간 병산서원 앞마당. 배롱나무 가득 빛나고 있다. 작은 물 웅덩이 그 위 떨어진 배롱나무 꽃. 사랑이 다하고 돌아선 여인이다. 마음속 깊은 슬픔은 아프지 않다. 그 순간 '아 행복하다'라고 속으로 울었다. 아니 웃었다. 사랑하는 아내,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그리움. 아름다운 기억, 다시 못 볼 사람의 얼굴. 그 풍경 눈에 담는다. 아내를 보내고 나서 처음으로 느낀 행복감이다. 꽃을 본다. 그녀를 본다. 현실이다. 꿈이다. 아내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렇게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 "결코 죽음 따위로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외친다.
(4/4) 사랑
조용하다. 침묵 속 어둑한 방이다. '어두워지려나 아니 밝아오려나' 이런 평화가 얼마만인가. 강릉집이다. 식탁에 천천히 아니 조심스럽게 앉는다. 따뜻한 미음 들듯 찬밥에 데운 밥을 바라본다. 급하게 먹다가 입천장 데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나도 나이 먹었나? 별 기억도 다 있네.' 첫 숟가락 먹고 씹다가 눈을 든다. 식탁 앞, 탁자 위 와이프 영정사진 속 얼굴, 미소 짓는다. 나를 바라본다. 아니 내가 쳐다본다. 저 사진, 자연 치유센터에서 누군가가 찍었던, 누군가 손에 의해 찍혔던. 그 사람 눈동자가 떠오른다. 와이프 눈을 쳐다봤을 눈, 검은 눈동자. 음악이 흐른다. 꽤 익숙한 아리아, 또다시 귀를 여니 생소한 음이 흐른다. 내 마음을, 몸을 휘젓고 흘러간다.
"나, 이 사진으로 해 줘" 병원 침대에 앉아 핸드폰 속을 뒤지던 와이프, 불쑥 내뱉는다. '뭘? 그래 알았어.' 차마 말은 못 한다. "영정 사진 말인가?" 묻지 않는다. 우린 서로 안다. 뭔가 준비해야 한다. "빌어먹을"이라고 하지 않는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 볼 수 없는 게 맞나?' 벌써 2년 되어 간다. 나는 너를 안고 평생 산다. 너는 내 품을 떠나지 못한다. 아니 넌 날 떠나서는 행복하지 못하다. 널 놓아주지 않을 테니, 아니 그런데 내버려 두면 안 되나. 어딘가에 있게 두면 안되나. 안 그러면 누군가 부술 듯 달려올까. 그 사랑 뭐라고. 오늘도 나는 냉정한, 차가운 남자가 된다. 마음까지 다진다. "그깟 죽음 따위로 날 잡을 생각하지 마!" 그나저나 언제 시원한 비 내릴까? 어제도 변죽만 울리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