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소설
나는 곰벌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곰벌레가 되었다.
전생에는 분명히 인간이었으나,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 나는 곰벌레가 되었다.
종이 위를 걷고 또 걸어 이 글을 적는다. 이 몸으로 글씨를 적는 것은 쉽지 않아서 나는 한 글자를 완성하면 앞에 있는 글자가 지워지지나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발견해서 내 한심함을 알아주기를 기대하기에 나는 이 글을 적는다. 여기까지 쓰는데 걸린 시간만 해도……. 아니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분명히 인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묻지 마라. 어쩌면 우리에겐 언어도, 소리를 낼 방법도 없으니 의사를 전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위안이나 삼으라고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남겨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하찮은 자신이 아닌 전생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선물이라기엔 너무도 슬프고 아픈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전생에서 괜찮은 남자였다. 괜찮은 직장에 괜찮은 외모, 괜찮은 집안을 가졌었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짝사랑했었다는 점과 재수 없는 방식으로 일찍 죽었다는 점만 빼면 정말 괜찮은 남자였다.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곤충을 아주 싫어하는 나는 갑자기 날아오던 벌을 피하려다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져 마침 열려있던 맨홀에 빠져 죽었다. 밥도 먹었으니 죽어서도 때깔이야 좋았겠지만 아, 이 저주스럽고 인상적인 죽음이여!!!
나는 그 길로 천국 행 티켓을 받았다. 천국의 문으로 들어설 때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오! 당신은 요 100년간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조롱인지 위로인지 알 수 없는 인사를 건네고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웃고 있는 그 사람은 천사라고 했다. 재수 없는 놈 같으니.
"천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 대가로 다음 생에 어떻게 태어나고 싶은지 고를 수 있게 해 드리겠어요."
이게 갑자기 웬 행운인가.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뭐가 좋을까, 백만장자의 아들? 정우성이나 이병헌만큼 잘생긴 얼굴을 가진 남자? 아니지, 아니지. 꼭 한국에서 찾을 필요는 없지. 조니 뎁이나, 제레미 아이언스 같은…….
그때 천국의 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 쪽에도 괜찮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 눈은 그들 사이를 부리나케 누볐다. 그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어떻게 벌써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내가 사랑했'었'던 그녀도 있었다. 나는 그녀를 1년이 넘게 만나지 않았다. 그녀를 본 순간 이제는 모두 희석되었을 거라 여겼던 사랑은 다시 깨어나 내 심장을 가득 메워버렸다.
천사가 말했다.
“시간을 드렸으니 이제 다 생각하셨죠? 저도 좀 바쁘니까 그럼 갑니다!”
그때 나는 하필 곰 벌레를 생각했다. 얼마 전에 ‘우주공간에서도 살아남은 곰 벌레’라는 기사를 재밌게 읽었던 까닭이다. 내 심장이란 놈은 이 곰벌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수분이 없는 곳에서는 미라처럼 잠들었다가도 작은 물방울 하나에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곰벌레.
눈을 떴을 때 나는 한 마리의 곰벌레가 되어 있었다.
생각의 속도란 참 알 수가 없다. 그 천사 놈의 질문이 내가 그녀라는 존재를 인식할 때쯤만 됐어도 나는 그녀로 환생해서, 물론 나르시시즘에 심하게 빠지긴 했겠지만(내가 어떻게 그녀가 된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쉽게 글을 쓰고, 소주, 오 소주 한 잔과 삼겹살 한 점을 입에 넣으며 웃기도 하고 지금처럼 그녀의 얼굴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떠올리며 애정 어린 증오를 불사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한들 무얼 할까. 나는 젠장! 이미 이 따위 기생충 같은 벌레가 되었는데. 아, 이렇게 나는 곰 벌레가 되었다.
그러나, 위안이 되는 것도 한 가지 있다.
저 쪽을 보라.
내가 이 글을 끝마칠 동안 저 곰벌레는 읽어줄 사람도 이미 없어진 연애편지의 첫 문장을 적어내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다.